조국에 젊음바친 "장한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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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다시는 이땅에서 나같은 비극의 삶은 없어야됩니다. 어쩌면 내인생 여정이 민족의 아픔일수도 있겠지요. 되돌아보면 정말 기구한 운명일 뿐이지요.』
조국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이국만리 중국땅에서 광복군의 유복녀로 태어나 항일독립운동에 몸담았고 동족상잔의 전정때는 간호장교로 입대, 구국전선에 젊음을 불태운 오금손씨(61·강원도화천군책동면구만리산64의9)는 환갑과 함께 6·25를 맞는 심정이 남다르다.
『한창 전투가 치열했을때는 저앞 산등성이마다 시체가 더미를 이루고 호수는 피로 물들었지요.』
장렬히 숨져간 전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는 오씨는 옛 격전지 파노호옆 산비탈에 독립유공자 정양원을 설립, 독립투사들의 휴식처 제공과 함께 군장병과 대학생등을 상대로 호국의식계도강연에 앞장서고 있다.
오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여정은 태어날때부터 시작됐다.
1930년 2월20일 독립군 오흥삼씨의 유복녀로 북경에서 태어난 오씨는 출생 7일만에 어머니 이복녀씨를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오씨는 아버지의 친구 중국군 왕진손장군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13세때 양부모마저 세상을 떠나 떠돌이가 됐다.
오씨는 15세때인 44년2월초 부친의 광복군동지를 따라 광복군 3지대에 투신,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던중 감격의 해방을 맞았고 46년4월초 광복군의 귀국대열에 끼어 배편에 인천항으로 귀국, 꿈에 그리던 조국땅을 밟았다.
난생처음 찾은 고국이었지만 일가친척 하나없는 외톨이 오씨는 반겨줄 사람도, 갈곳도 없었다.
학력이라고는 광복군이 운영했던 중국서주한인학교에 4년간 다닌게 전부인 오씨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 개성간호전문학교에 입학했다.
50년2월 간호학교를 졸업한 오씨는 어엿한 간호원이 돼 개성도립병원에 근무하던중 동족상잔의 비극 6·25를 맞은 것.
『25일 늦은 밤이었어요. 팔다리가 잘리고 눈알이 튀어나간 군인과 민간인환자들이 병원을 가득 메웠지요.』
광복군출신인 오씨는 또다시 조국의 부름을 받고 동료간호원 23명과 함께 백골부대에 간호장교로 자원 입대했다.
전쟁의 와중속에 군번은 못받았지만 군번대신 24명이 왼쪽팔목에 문신을 새겨 전우임을 표시했다.
18연대 수색중대 의무장교로 배치된 오씨는 중공군과 북괴군 14사단병력을 수장시킨 구만리전투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 부상병 치료는 물론 직접 총을 들고 적군을 사살하는등 전공도 세워 대위로 특진했다.
51년5월 화천군사내면사방거리 전투에서 적군에 포로가 된 오씨는 이·손·발톱을 모두 뽑히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손과 배·다리·옆구리에 총상을 입었다. 오씨는 현재 2급 갑 상이용사로 아직 총상의 후유증에 고생하고 있다.
오씨는 53년 제대후 같은 백골부대 18연대3대대 최모소위와 결혼, 한때 서울시청 공무원생활을 하다 54년 전상부위악화와 가정사정으로 구만리에 이주, 혼자 살고있다. 【화천=권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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