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핵실험에도 꿈쩍 않는 세계 금융시장…9·11 테러 '학습효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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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전격적인 핵실험에 불구, 세계 금융시장은 이상하리만큼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고 있다. 뉴욕과 런던.프랑스 증시는 연일 상승하고 있고, 도쿄.상하이 증시도 안정된 모습이다. 핵 실험 당일 폭락했던 국내 증시도 빠르게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세계 금융시장이 웬만한 위험요인은 항상 존재하는 상수(常數)로 감안하면서 충격에 적응하는 내성(耐性)을 키웠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예상외로 차분한 국제 금융시장=10일(현지시간) 뉴욕 시장에서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지난 주말 대비 5bp(베이시스 포인트=0.01% ) 오른 연 4.75%를 기록, 9월19일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흔히 위기상황에서 미국 국채는 안전투자처로 인기를 끌면서 가격이 상승(금리가 하락)하곤 하는데, 이번엔 국채 가격이 하락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날 국채 가격 하락의 주된 이유는 투자자들이 미국의 인플레 우려에 따라 내년 초 미국 금리인하 가능성이 작아졌다고 본 것이지만 동시에 북핵 문제가 시장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증시의 다우지수도 이날 장중 한때 사상 최고치를 다시 경신했으며, 유가도 핵실험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가능성 감소로 오히려 떨어졌다.

외환시장의 경우 달러가 아시아 통화에 대해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폭은 크지 않은 상태다. 달러 강세는 핵보다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고위 인사들이 연이어 금리인하 가능성을 부인한 데 따른 측면이 강하다.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20엔에 육박할 정도로 엔화가 10개월만에 가장 약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북핵 실험 훨씬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현상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 증가 등 다른 요인의 영향이 더 크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국내 시장은 빠른 속도로 안정 되찾아=북핵 문제가 악화하면 직격탄을 맞게 될 국내 시장에서도 예금 인출 및 펀드 환매 사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금융 소비자들이 성급한 행동에 나서기보다는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은행의 주식형펀드 잔고는 2일 8조8782억원에서 4일 8조8905억원, 9일에는 8조9496억원으로 되레 늘었다. 하나은행의 주식형펀드 잔고도 2일 16억원, 4일 100억원, 9일 12억원 증가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일 펀드 환매액이 2조724억원, 설정액이 1조9702억원으로 순환매 규모가 1022억원이었다. 그러나 펀드 유형별로 보면 채권형이 2253억원 줄어든 반면 주식형펀드 186억원, 혼합형펀드는 472억원 늘어나 핵실험의 여파로 펀드가 줄어든 게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예금규모 역시 핵실험 이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충격에 내성 생겼나=로이터 통신은 풍부한 유동성과 펀더멘털에 대한 투자자들의 믿음, 정세불안에 대한 내성으로 인해 세계 금융시장이 안정을 잃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장이 9.11테러, 이라크전쟁 등 대형 사건을 겪으면서 충격에 적응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소시에테 제너럴의 미샬라 마르퀴상 전략경제조사국장은 "시장이 지정학적 불안요소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며 "투자자들이 세계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믿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실제 마드리드 폭탄 테러 등 대형 사건 발생 후 세계 금융시장은 잠깐 흔들리다가 곧바로 제자리를 찾았다. 세계 정세를 완전히 바꿔버린 9.11 테러도 경제적으로는 별다른 재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유가 하락과 인플레 우려 감소, 기업의 인수합병 소식 등으로 세계 증시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핵실험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핵실험 충격이 완화된 측면도 있다. 독일 투자은행 드레스트너 클라인보르트에 따르면 북 핵실험은 전 세계 주가가 전달 대비 2.1%, 전년동기 대비 10.5% 오른 때 발생했다.

로이터 통신은 지금처럼 펀더멘털이 좋고 유동성이 풍부한 상황에서 시장의 분위기를 깨는 것은 중증 호흡기 증후군(사스)처럼 소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사건뿐이라는 게 시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과도한 낙관론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핸더슨 글로벌 투자의 토니 돌핀 경제전략국장은 "북한 핵실험에 대한 무반응은 최상만 보고 최악은 보지 않으려는 시장과 투자자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창희.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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