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핵실험 강행 … 한반도 '핵 공포' 덮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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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합동참모본부는 9일 오전 전군에 경계태세 강화를 지시했다. 육군 전진부대 도라대 대원들이 철책선에서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북한의 핵실험은 한반도의 안보환경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의 기조를 일거에 침몰시켜 버렸다. 노 대통령도 9일 기자회견에서 포용정책의 계속이 어려워졌다, 남북대화의 입지가 좁아졌다, 핵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자율성이 상실됐다고 말해 사실상 대북정책의 파산을 선고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책임이 일차적으로 북한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부시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 노 대통령은 핵 문제에 진전이 없는 한 남북 정상회담은 의미가 없다고 말해 놓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에 매달려서라도 김정일과 회담하고 싶어했다. 자위 목적의 북한 핵 개발은 일리가 있다고 말하고는 추석 휴가까지 반납하고 위기수습에 골몰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핵 문제를 기본적으로 북한과 미국이 풀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한국은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미협상을 보완하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 와서 핵 문제는 한국이 주도해 풀어야 할 민족의 과제가 돼 버렸다. 철학도 비전도 없는 대북정책은 핵실험의 충격을 견뎌 낼 수가 없다.

부시 정부 대북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 지도부의 교체다. 부시 정부에는 북한 정책이 없다. 클린턴 정부가 사용 후 핵연료봉의 재처리를 북한이 넘어서는 안 될 저지선(Red Line)으로 설정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부시 정부는 어떤 저지선도 설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정일에게 부시 정부가 용인하는 저지선은 핵실험일 것이라고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는 여유를 허용하고 말았다. 지난 15년 동안 북한은 핵을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사용해 왔다. 억지력으로서의 핵은 2차적인 것이었다. 북한은 핵실험을 함으로써 카드로서의 핵과 억지력으로서의 핵 순위를 바꿔 버렸다. 일을 저질러 놓고 협상을 하자는 노림수다.

북한이 핵을 가진 한반도는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한국이 누리던 재래식 전력의 우위는 북한이 핵탄두를 경량화.소형화하는 순간 무너진다. 한국은 대북협상에서 북한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당치 않은 요구를 자주 해 올 수 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살림이 거덜나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주제에 절대흉기를 가진 사람과 이웃해 사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핵 이불 덮고 핵 베개 베고 자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 핵실험이 외국인 투자자를 내쫓으면 한국 경제가 흔들린다. 실업이 늘고 생활이 고달파진다. 일본과 중국과 대만이 핵무장 경쟁을 벌여 동북아가 불안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과 일본이 유엔 결의에 기대 북한을 경제적으로 봉쇄해도 북한은 한국과 국제사회의 격앙된 여론이 진정될 때까지 버틸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한국과 중국의 반대로 실현 가능성이 작다. 이번에도 김정일의 노회한 계산이 적중할 것 같아 좌절감을 느낀다.

우리는 속수무책인가. 북한은 핵 보유를 선언하고 핵실험을 해 버렸다. 그것을 제자리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핵실험을 했다고 바로 실전(實戰)에 쓸 핵무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핵탄두를 미사일에 탑재할 만큼 소형화.경량화해야 한다. 그때까지 시간이 있다. 미국 의회가 9월 말 국방예산 관련 법안에 60일 이내에 대통령이 고위급 대북정책조정관을 임명하라는 조항을 첨부한 것은 다행이다. 의회가 그런 법안을 만든 것은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신을 반영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북한의 핵실험으로 부시 정부는 북한과 대화하라는 압력을 더 받게 될 것이다.

성패는 불투명하지만 해법은 여기 있는 것 같다. 한국은 북한의 핵실험 강행에 분노는 하되 미국과 일본의 제재 일변도에는 반대하는 중국.러시아와의 긴밀한 공조로 북한과 미국을 설득해 북.미 직접대화로 이끌어야 한다. 노 대통령이 말한 대로 북한 눈치나 보는 대북정책의 전면 재검토도 불가피하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 살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미 직접대화로 북핵을 오늘의 수준에 동결하지 않으면 럼즈펠드의 경고는 남한에서 먼저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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