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계만 들여다보는 정치/고흥문(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소정상의 만남을 고비로 대통령과 민자당의 인기가 급상승했다고 반가워하는 집권여당의 모습은 과히 좋아보이지 않는다. 하긴 한때의 지지도 14%까지 내려가 무척 당황해 했던 여당의 입장에서 작금의 인기상승에 사기가 오르는 것은 자연스런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유행이 되다시피한 언론기관의 전화 여론조사라는 게 뭔가. 그것은 그때그때의 인기도 내지는 지지도를 재는 간이조사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조사결과로도 여론의 향배가 드러나긴 하지만 민의의 깊은 뜻을 알자면 아무래도 그런 간이조사로는 부족하다.
○외교성과에 너무 들 떠
필자의 얕은 소견일진 몰라도 지지도조사란 마치 체온을 재는 것과 같아 건강의 척도가 되기엔 부족하듯이 일반대중의 일시적 감정상태를 보게 될 뿐 심회를 재기는 어렵다. 그런데 집권여당은 오르내리는 체온을 보며 일희일비하고 있다. 딱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집권여당은 6ㆍ29선언을 통해 민의에 승복함으로써 탄생했다. 따라서 정권의 수임기간이 다할 때까지 국민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겸허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북방정책의 성과가 역사에 남을 만큼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자화자찬이 지나쳐 들뜬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여론조사 결과 인기가 오르게 된 것은 집권당의 북방정책이 한반도의 통일ㆍ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 같다는 국민적 기대의 한 표현이지,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급상승한 인기에 취해 현안해결을 게을리 한다면 그건 우리 모두의 불행이 된다.
지금 국민들의 준엄한 요구는 내치의 난맥상을 하루속히 정리정돈하라는 쪽으로 집약되고 있다. 총체적 위기의 요인가운데 신뢰성 위기는 다소 해소된 느낌이지만 민생치안을 비롯한 위기요인은 여전히 남아있다. 집권여당은 모름지기 호전된 분위기를 활용해 내치에서도 역사적 전기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기우인진 몰라도 집권당 일각에서는 북방정책의 성과를 보면서 이를 권력구조 개편에 이용해 보려는 저의를 감추지 못하는듯 하다. 부심하는 개헌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권력구조 개편을 전위할 때인가. 7ㆍ4공동성명이 유신으로 이어진 전례를 상기하면서 6ㆍ29 세돌을 앞두고 정말 심기일전할 것을 경책삼아 일러둔다.
새롭게 입장을 정리해야 하기는 야당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진정한 뜻이 야당의 통합에 있음이 명명백백한 이상,분파적 언행을 계속하는 평민ㆍ민주ㆍ재야는 이제 6월항쟁의 정신아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통합논의는 물건너가고 오는 15일 또하나의 야당이 정식출범케 되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분명코 제1,제2야당의 경쟁이 아니다.
지역당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받는 강력한 야당의 출현만이 국익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당에도 6ㆍ29적 선언이 필요하다.
야당은 민자당의 출현을 야합이라고 비난해 오고 있는데 그렇다면 진짜 구국의 결단이 무엇인지를 왜 국민앞에 보여주지 못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통합이라는 결단은 시대적 당위다.
○야는 자기입장만 걱정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국정현안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북방정책의 결실을 뜻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탄할 일은 오늘의 우리 야당들이 집권여당의 북방외교 성과로 더욱 옹색해진 자신들의 입지나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는 정말 곤란하다. 냉정히 말해 특히 북방외교는 집권당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국제무대에서의 국위선양 차원을 넘어 민족통일로 가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방외교는 마땅히 초당적 외교가 되어야 하는데 초당적 외교라는 의미에는 이를 빌미로 집권당이 딴 생각 품지 않고 오로지 국가 백년대계에 몰두케 하는 야당의 감시적 협력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서도 야당은 군소정당이 아닌 강력한 선의의 반대당으로 재등장해야 한다.
야당은 하루속히 통합을 실현함으로써 도도히 흐르는 신사고적 역사앞에 그들의 입장을 정리정돈해야 할 것이다. 야당이 자신들의 입장을 재정립하지 못하고 과거처럼 집권당의 실책에서 오는 반사이익이나 주워담을 요량이라면 솔직히 말해 그런 야당은 필요없고 국민도 용납치 않을 것임을 다시 경책삼아 일러둔다.
물론 각계가 고루 반성하고 입장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말은 그간 언론을 통해 무수히 강조되었으므로 필자의 소견이 중언부언인줄은 안다. 그러나 역사의 전면에 서서 국민의 여망을 충족시킬 그룹으로서의 정치인들에게 몇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때문에 지난 6개월,이 시평란에 얼룩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치인을 의식한 글을 써왔다.
독자들 가운데는 왜 재벌에 대해서는 일침을 놓지 않느냐고 의견을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이 땅의 재벌들에게도 할 말은 많았다.
특히 작금의 경제사정을 생각하면 일부 재벌들의 행태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우리 경제가 선진국으로 가는 고비를 넘는 대목에서 그들은 노사분규나 핑계대고 뒷구멍으로 재테크ㆍ땅투기에 열중함으로써 오늘날 심각한 기술위기ㆍ생산성 위기를 자초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5ㆍ8조치 한달이 넘도록 부동산 매각실적이 전무하다시피 부진한 점을 보면 아직도 자신들의 입장을 재정립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땅의 재벌들에게 과감한 발상전환이 요구되기는 정치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들 가운데는 그간 국민이 모아준 지원과 희생에 감사하기 보다 자신들의 공적을 앞세우는 성향이 짙게 깔려있다. 따라서 재벌들의 신사고 역시 시대적 요청사항임에 틀림없다.
○재벌들도 발상 전환을
그러나 정치가 바로서지 못하면 각계의 기강이 바를 수 없고 정치인이 각성하지 못하면 각계의 행태가 제자리를 잡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몇번의 기회를 정치얘기로 아껴 썼던 것이다.
시평 필진의 펜을 놓으면서 한마디 더 보태고 싶은 말이 있다.
이제 이 나라는 마지막 분단의 땅이 아닌 인류미래를 제시하는 약속의 땅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우리가 90년대에 분단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나라는 경제뿐 아니라 국제 정치무대에서도 20세기 대미를 장식하는 성공담으로 인류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제발 그렇게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전 국회부의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