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5. 내셔널 지오그래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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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제 영어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미주리 대학 언론학과는 '컬럼비아 미주리안(Columbia Missourian)'이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행했다. 교수들이 편집장.부서장을 맡고 학생들이 취재를 담당했다. 유료 신문이었고, 다른 일간신문과 경쟁했다. 나는 이런 활동을 통해 일간지 기자들과 같은 수준의 경험을 쌓았다.

재학 중 최우수학생 공로상도 받았다. 나의 존재를 알리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외부 공모전에 여러 차례 응모.수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졸업 무렵 나는 꽤 유망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라이프'나 '룩' 같은 유수한 잡지사에도 입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덤 교수에게 진로를 상의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으로 가게." 내 취향에는 뉴스를 주로 다루는 '라이프'나 인물 이야기를 중시하는'룩'보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맞는다는 조언도 해줬다.

1888년 과학자와 탐험가, 교육자들로 이루어진 33인의 창립회원들이 '인류의 지리지식 확장을 위하여'라는 기치를 내걸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National Geographic Society)를 설립했다. 비영리 과학교육 기구였다. 협회는 그 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창간했다. 이 잡지는 자연, 인류, 문화, 역사, 생태, 우주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종합 교양지였다. 협회 지원으로 피어리(Peary, 1856~1920)가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했으며, 아폴로 11호가 협회의 깃발을 달에 가지고 가기도 했다.

기사와 사진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독자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구독료는 선불이었으며 무가지는 단 한 부도 없었다. 1967년의 발행부수는 세계적으로 800만 부에 달했다. 잡지 판매 수익만으로도 극지 탐험과 고대 유적발굴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 수천 건을 지원할 수 있었다. 기자에게는 최고의 무대임이 분명했다.

워싱턴 백악관 앞, 하얀 대리석 건물의 협회를 직접 찾아가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자리가 없으니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 준비가 되면 다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준비된 프로만 썼다. 나 같은 애송이를 뽑을 리 없었다.

석사논문을 쓰며 졸업을 준비할 무렵,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나를 신입 기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 꿈같은 현실이었다. 알고 보니 이번에는 젊고 패기 있는 신참 기자를 선발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지원서를 제출한 나를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67년 10월 세계적인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기자로 입사하게 되었다. 서울을 떠난 지 7년 만이었다.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김희중 갤러리

고교 2학년 때인 1957년 성탄절 아침, 카메라를 메고 명동성당으로 올라갔다. 나무 살에 창호지를 발라 만든 별 장식 아래 성당 마당에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역광을 받고 있는 성당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 댄 순간, 하얀 모자를 쓴 수녀 두 분이 앵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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