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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경협 서두르면 실리 잃는다(좌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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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교역에 지나친 기대나 흥분은 “금물”/생필품시장 선점하면 커다란 의의
정식수교이전과 이후의 외교관계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교역이나 투자등의 경제활동이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10배·20배로 늘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소 양국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벌써 수십억달러의 차관제공등 성급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정작 경제인들 중에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소련과의 교역이나 소련연구분야에서 활동해온 전문가들의 전망을 좌담으로 엮는다.
□이풍씨<현대경제사회연구원장> 김영도씨<진도패션사장> 박웅서씨<삼성석유화학사장>
▲이풍 현대경제사회연구원장=한소 양국간에 정식수교가 이루어진 후에 투자보장이나 조세협약등의 「안전판」이 마련되어 잠시 교역규모가 반짝 늘어나는 것은 기대할 수 있겠으나 조만간 한계에 이를 것은 분명합니다. 수교가 됐다해서 교역이든 투자든 큰 기대를 거는 것은 금물이라는 얘기지요.
지금 다들 너무 들떠있는 것같은데 좀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영도 진도패션사장=85년부터 소련을 다니다보니 요즘 소련의 경제적 과제는 「나눠 갖기」 원칙을 「벌어 갖기」 원칙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나눠갖기 원칙에 한 70년 젖어있었으니 그것을 고치는 데도 70년정도는 걸린다고 할 만큼 그리 쉽게 될 일이 아닙니다.
▲박웅서 삼성석유화학사장=현재 소련과의 경제교류에 1백정도의 문제가 있다면 2중과세방지협정이나 투자보장협정은 그중 0.5정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한마디로 그런 약속이 문제가 아니라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물리적 기본틀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소련은 심각한 위기국면에 처해있습니다. 통제경제에서 자유경제로 가자는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강력한 정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로 치면 서울시나 충북이 독립하겠다고 하는 판이고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예컨대 사재기와 인플레등이 심각해 정부는 어느 때보다도 취약한 상태입니다.
전문가들 중에는 올해말에 소련의 위기상황이 한계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소련으로서도 이같은 정권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소수교와 같은 일은 중요도가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원장=사실 소련의 개혁이라는 것이 아직까지는 말뿐이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소련에서 직접 만난 지식인들도 다들 『위로부터의 혁명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진짜 개혁을 하려면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더군요. 한마디로 정치적 위험때문에 경제개혁은 매우 어렵고 제가 보기에는 금세기 말까지 소련의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김사장=이런 때일수록 신중해야 한다는 말씀은 백번 옳은 이야기지만 일단 정식수교를 맺는다는 것은 기업인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지금 소련이 가장 절실한 것은 생필품이고 그 시장을 우리가 선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본전치기라도 되면 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루블화도 언젠가는 태환이 될 것이고 또 개혁이 거꾸로 가지는 않을 것이니 10년·20년 뒤를 내다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사장=바로 그점이 제가 걱정되는 것입니다. 공산국가들의 자유화과정을 보면 개혁과 그에 대한 반동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련과 중국을 예로 들자면 중국은 오히려 지금 단계에서 개방추세로 갈 가능성이 크나 소련은 자유화에 대한 반동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원장=소련의 전통적 무역정책이 있습니다.
첫째,자급자족 지향형이고 둘째,무역은 어디까지나 산업화를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셋째,국가가 무역을 독점한 상태에서 비교우위에 의한 특화를 거부하고 있고 넷째,수입이 우선 결정되면 수출은 그에 따라 나중에 결정되며 한마디로 요약하면 임기응변적 무역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소련은 경제보다 국방·외교·정치가 항상 우선이고 따라서 만일 우리가 소련에 대한 자원의존·무역의존·투자의존도를 높였다가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때 「경제전」을 당할지 모른다는 상황까지 내다보고 있어야 합니다.
▲김사장=우리가 85년부터 소련에서 모피를 사오면서도 달러대신 레인코트등의 구상무역을 하자고해도 밍크처럼 언제든 달러를 벌수 있는 것은 구상무역의 대상으로 내놓지를 않습니다.
그런게 바로 그네들의 무역정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수교는 고무적인 일이고 예컨대 우리의 국방비부담을 줄일 수 있다면 그때의 경제적 효과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박사장=고무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자는 것일 뿐입니다.
북한과의 관계만해도 최근 타스통신 기자가 북한에서 쫓겨나는등 모스크바와 서울이 가까워지는 만큼 반비례하여 서울과 평양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안할 수 없습니다.
▲이원장=대소경협을 가로막는 걸림돌들을 우회하려는 기업인들의 의욕은 높이 사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팔 것은 많은데 가져오고 싶은 것은 별로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정말 소련이 극적으로 경제개혁에 성공한다면 모를까,현단계로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소련의 문제는 단순히 비누나 치약등의 소비재 부족만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두고 기존의 군사·중화학에 대한 투자는 그대로 둔 채 소비재는 우리의 손을 빌려 해결하면서 군사적 우위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실제로 소련과 수교하고나서 쓴 물을 들이킨 나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김사장=저와 친한 소련기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고르비가 합작이나 투자를 자유화했더니 전부 비싼 것만 만들려는 통에 생필품의 부족은 더욱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발 싼 물건좀 만들어 팔아달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정부 안전장치를 걸어 나가 볼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박사장=어쨌든 소련과의 정식수교가 좋은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동시에 정치권이나 언론·국민 모두가 지금처럼 들뜨지말아야 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계사적 측면에서 보아도 고르비가 성공하도록 도와야 하느냐 아니냐 한다면 조금이라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10억달러정도 버리는 셈 치고 장기차관으로 생필품지원에 나서는 것도 괜찮은 일 일수 있습니다.
또 소련이 아무리 달러가 없다지만 연간 1천억달러 규모에 이르는 총수입중 절반인 5백억달러어치 정도는 지금도 제대로 달러를 주고 사들여가는 것인 만큼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수입선을 한국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나 차관을 주거나 교역을 확대하고 투자를 할 때는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실리를 따져가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처럼 들떠서 큰 기대를 거는 것은 금물입니다.
정식수교나 투자보장·2중과세방지협정 등은 교역의 「장식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정리=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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