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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이재민들 "추석은 무슨…겨울나기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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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무슨 추석, 개 보름 쇠듯 해야지요."

인제군 인제읍 가리산리 컨테이너 단지에 살고 있는 박송옥씨가 딸 결혼식 때 쓰려고 도토리를 손질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같은 단지 컨테이너에 사는 이재민.

7월 수해로 2만여 평의 농원과 집을 잃은 인제군 북면 한계3리 백현주(82.여)씨는 '명절날 맛 좋은 음식도 해 먹지 못하고 그냥 넘긴다'는 뜻의 속담처럼 올해 추석을 이렇게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이 사망한 지 3년째라 올해가 대상(大喪)인 셈이지만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등 차례를 지낼 형편이 안돼 "손님이 올까봐 못 모신다고 연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란 속담처럼 모든 것이 풍성한 추석이 다가오지만 7월 집중호우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에게는 남의 얘기다.

추석을 나흘 앞둔 3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덕적리. 오가피 등 4000여 평의 농사를 짓던 정석심(53.여)씨는 "집과 농토를 모두 잃어 한동안 살 수 없을 것 같더니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조금 안정됐지만 명절을 지낼 여유는 없다"고 말했다. 차례를 지내야하지만 아들 내외를 읍내로 보내고 컨테이너에서 지내는 처지라 올해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는 그는 "설에나 잘 모시겠다"고 말했다.

가장 많은 7명(실종 3명)의 인명 피해를 낸 인제읍 가리산리. 마을 입구 장승고개에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쓴 현수막이 아직 걸려 있었다. 눈 앞에서 어머니와 동생을 물에 떠내려 보내고 시신도 찾지 못한 채 혼자 지내고 있는 심모(36)씨는 바깥 출입은 물론 마을 주민과도 접촉하지 않고 있다. 옆 집 주민이 가끔 들여다 보며 안부를 확인할 뿐이다.

차례는 생략하고 산소만 다녀오기로 했다는 박송옥(54.여)씨는 추석보다 11월로 예정된 딸 시집보내는 일이 더 걱정이다. 모든 것을 잃어 제대로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피로연에 쓸 묵을 만들기 위해 도토리를 주워 손질하는 것이 박씨의 요즘 일과다.

하천으로 변한 밭에서 당시 상황을 얘기하는 인제읍 가리산리 김한수씨. 김씨의 오른쪽 어깨 뒤로 보이는 소나무 앞이 김씨가 살던 집터이다.

같은 컨테이너 단지에 사는 장병선(43)씨의 걱정은 겨울나기. 산사태 지역 사방공사장에서 품을 팔고 있는 그는 "차례는 메(밥)만 떠놓고 지내면 되지만 10개월 된 아들(선빈)을 포함한 세 아이와 부인 등 다섯 식구가 전기 패널로 난방을 하는 컨테이너에서 겨울을 나기에는 이 지역이 너무 추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계 3리 이희옥(77)씨는 추석을 타향에서 지내게 됐다. 수마에 부인을 잃고 혼자 컨테이너에서 생활했던 그는 지난달 28일 아들(48) 손에 이끌려 서울로 갔다. 추석만 아들 집에서 지내고 돌아온다고 했지만 겨울을 나고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 주민 얘기다.

한계 3리 청솔야영장을 임대해 운영했던 손영희(66)씨에게도 올 추석은 없다. 3000여 평의 솔밭이 흔적없이 사라져 컨테이너 생활을 하지만 세입자라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 고씨는 "송이도 안나고 몇 푼이라도 벌려고 부인과 이틀이나 도토리를 주웠지만 판로가 없어 그만뒸다"며 "먹고 살 일이 걱정" 이라고 말했다.

이들처럼 컨테이너에서 추석을 맞는 이재민은 인제 202가구, 평창 92가구 등 296가구에 달한다. 이 가운데 170가구는 겨울을 이곳에서 나야한다. 강원도는 컨테이너를 외부단열재로 마감하고, 창문 및 출입문에 방풍시설을 설치하는 등 이재민이 겨울을 나는데 불편이 없도록 하겠다고 3일 밝혔다.

한편, 지난달 29일 한계령에 차량 통행이 재개되면서 응급복구는 끝났다. 그러나 하천에는 집채만한 바윗덩어리와 뿌리채 뽑힌 나무가 곳곳에 쌓여 있는 등 수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과 대조됐다.

인제= 이찬호 기자 kab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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