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빈집을 미술로 화장 마을도 주민도 환~해졌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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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항구를 끼고 있는 전북 군산시 해망동은 쇠락한 동네다. 일제 치하 땐 일본에 쌀을 송출하면서, 해방 후에는 목재 산업의 활황으로 '밤이 낮처럼 밝았다'는 기억은 어느새 전설이 됐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과 비좁은 골목길엔 우울함과 자조, 권태만이 남아 있다.

그랬던 해망동이, 요즘 기분 좋게 술렁이고 있다. 지난 여름 이곳을 찾아 온 20여 명의 젊은 미술작가들이 몇 달간 동네 곳곳에 숨결을 불어넣으면서다. 문화관광부가 복권기금을 확보하고 민간단체인 공공미술추진위원회가 사업을 벌이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곳 이외에도 전국의 10곳에서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는 11월에는 모두 결과물을 드러낼 예정이다.

"워메, 동네 느낌이 싹 달라졌당께. 내가 미술을 뭐 아는가. 젊은이들이 뭔가 하려고 항께 편안하게 도와주자 했을 뿐이제."

박공림(70) 할머니의 말처럼 작가들은 동네 주민들에 의한, 동네 주민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0여가구의 집 담벼락, 골목길, 빈집이 모두 캔버스요 설치 장소였다.

동네 입구 우물을 시작으로 길바닥에 그려진 스프레이 꽃을 따라가다 보면 해망동 프로젝트의 면모를 하나 둘 발견하게 된다.

축대를 따라 늘어선 40여개의 대나무 바람개비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연신'끼익끽'즐거운 소리를 낸다(1). 코너를 돌 때마다 놓여있는 평상에는 꽃무늬 그늘막이 쳐졌다(2). 어르신들이 내놓은 낡은 옷으로 작가와 할머니 몇 분이 만든 작품이다. 한 작가는 해망동의 집들을 작은 소품으로 만들어 방 하나에 펼쳐놓았다(3). 담벼락이나 화장실 벽에는 군산 출신 작가들의 시가 눈길을 끈다.

해망동의 빈 집 여섯 곳은 '동네 미술관'이 됐다. 주민들의 모습과 역사를 사진과 영상, 설치로 보여준다. '박병선 동네 미술관'의 안방 천장에는 말풍선 모양의 할머니 그림들이 걸려 있다. '먼디서 왔는가비''되배 했다는디 함 가보장께'등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들을 모았다. 건넌방에는 개 밥 주는 할머니, 평상에서 쉬는 할머니 등 일상을 포착한 사진 액자들이 말을 건다. 동네에 몇 안 되는 아이들은 만능 의자, 어른들을 위한 햇빛 가리개 등 해망동에 사는 데 필요한 물품들을 만들어 방 한 켠에 선보였다.

산비탈의 집들은 고정관념을 탈피한다. 길을 걷다 밟게 되는 게 아랫집 지붕이고, 어느 집의 사적인 마당을 다섯 집이 공유하곤 한다. 푸른색 기와지붕 집에 얹힌 'L.O.V.E'도 이런 개념에서 출발했다. 맞은편 평상에 앉아서 바라보기 딱 좋은 눈높이에 걸려 있다. 동네 어르신들의 집결지라는 이 평상에서 바라보는 메시지는 따뜻한 기운을 돌게 한다. 의자 둘이 또 다른 친구(의자들)를 만난다(4). 혼자 앉아있어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주민들은 쉬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 되레 귀찮아 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이 동네에 이제 와서 무슨 소란이냐고.

그러나 두 달간 작업을 통해 주민과 작가들은 마음을 열었다. 작업을 하다 지치면 동네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쉬고, 또 그 과정에서 작업 내용을 바꿔나가기도 했다. 하영호 예술감독은 "어떻게 보면 작고 사소한 변화가 아닌가. 이것이 과연 공공미술의 해답일까 고민을 많이 했다"며 "많은 사람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된다면 실패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중을 위한 미술'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공공미술. 큰 빌딩 앞 조각상, 번화한 길거리의 벽화만이 공공미술의 주류일까. 지금 대한민국 곳곳에선 그리 소란스럽진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공공미술이 꿈틀대고 있다. 해망동 프로젝트는 그 시작일 뿐이다.

군산=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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