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준비 없는 공판중심주의는 위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최근 이용훈 대법원장이 전국 법원을 돌며 사법개혁과 관련한 법원 우월주의적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법조 3륜이라고 하는데 사법의 중추는 법원이고, 검찰과 변호사단체는 보조하는 기관"이라거나 "검사들이 밀실에서 진술을 받아놓은 조서를 어떻게 공개된 법정에서 나온 진술보다 우위에 놓느냐"는 발언 등이 그것이다.

어느 누구도 종래의 수사기록 중심의 재판 방식에서 검찰과 피고인이 대등한 공격과 방어권을 갖고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도록 재판 형태를 선진화하자는 데 반대하지는 않는다. 피고인의 인권보장과 실체적 진실 규명을 함께 이루어 진정한 사법정의를 구현하자는 취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같은 주장 뒤에 비논리적 발상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 대법원장의 발언은 '실체 진실의 발견'을 법정에서만 추구해야 할 가치로 전제한 것처럼 들린다. 그럴 경우 현행 수사 구조는 잘못된 것이어서 무조건 지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재 수사기관에서의 조사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이를 폐지해야 할 필연적 가치로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형사사법 제도의 문제는 피의자.피고인의 인권보장과 아울러 범죄자의 처벌 및 피해자의 권리구제라는 상반된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반된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옳지, 수사기관의 역할에 대한 무조건적 불신에서 출발해선 안 된다. 법원을 포함하여 검찰 등 사법기관의 존재 이유가 국민의 불편을 최소화하면서 적정 절차를 통한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장의 발언대로라면 수사 절차가 무시되고 아예 처음부터 법정에서 다시 조사를 진행해야만 한다.

이런 방식으로 법정에서만 진실을 추구한다고 할 경우 현재의 법원 인원과 조직으로 과연 재판 진행이 가능할지 그 현실성에도 의문이 간다. 또 지금까지 직권적 수사(조사) 활동을 재판 기능으로부터 분리해 검사와 그 지휘를 받는 경찰에 맡긴 형행 제도의 근간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피고인이나 증인이 공판정에서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부인.번복할 때 무조건 수사 서류를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은 범죄자의 인권만을 중시한 편향된 시각이다. 검사가 기소.불기소를 결정할 때 수사 단계에서 나온 진술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수사 단계의 진술이 공판정에서 무용지물이 된다면 검사는 무엇에 근거해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이라면 왜 굳이 수사 절차를 거쳐야 하며, 피해자의 인권은 누가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생길 정도다.

국민이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는 이유는 단지 '법원'이 판결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국민의 '최종적' 인권보호 기관으로서 가장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함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또 법원은 다른 어떤 기관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법관들의 도덕성은 물론, 현직 판사를 거친 영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이른바 '전관예우'에 대한 불신이 국민 사이에선 여전히 팽배해 있다. 국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제도의 도입까지 추진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사법 불신에 기인한 셈이다.

결국 국민의 사법 불신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안은 개개 법관이 양심에 따라 충실히 재판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런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판중심주의를 사법개혁의 이름을 빌려 포퓰리즘적으로 접근해선 위험하다. 준비 없이 공판중심주의를 밀어붙였다간 재판 지연과 고비용 등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정웅석 서경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