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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산책] 즐기는 영화 … 느끼는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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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기자

■ 화투 도박의 '승부사'… 이판사판 화투판

명절이면 심심풀이로 화투장을 만지다 남다른 승부사 기질을 느꼈다고? 제발 거기서 멈추기를. 프로 도박사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은 이 영화의 대리체험으로 충분하다. 속임수 화투판에서 빠져 하룻밤 새 누나의 위자료를 날려버린 주인공 고니(조승우). 그때의 화투 꾼을 찾아 판을 전전하다 고수 중의 고수 평경장(백윤식)의 제자가 된다. 이후 화려한 촬영기법과 숨가쁜 편집이 타짜들의 대결을 비정하고도 스릴 넘치게 그려낸다. 도박의 살벌한 중독성과 치명적인 결과는 기본 전제. 손가락을 자르고도 다시 도박판에 뛰어드는 비참한 인생 역시 등장한다. 배우들의 고른 호연 중에도 도박판을 배후에서 설계하는 여자, 정마담 역할의 김혜수가 빛난다. 전라 연기도 마다하지 않는 요부(妖婦)의 매력과 '첫사랑'(1993년작)으로 돌아간 듯 순진무구한 표정을 번갈아 선보이며 영화 속 남자들을 쥐락펴락 한다.

■ 김치 "썰어, 담가, 묻어!" ….묵은 김치 같은 맛

지난해 추석 '가문의 위기'에서 조폭생활을 접은 백호파 식구들이 이제 김치공장을 차려 합법적인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 자산은 백호파 여두목 홍덕자(김수미)의 손맛. 홍덕자가 홈쇼핑에 출연, 젊은 시절 남편의 바람기를 손맛으로 잠재운 이력을 청산유수로 읊는 장면은 배우 김수미의 입심 내공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전편의 악당인 봉 검사(공형진)가 출소하면서 김치장사는 위기를 맞는다. 이 정도 메뉴로는 관객이 성에 안 찰 것을 짐작한 듯, 영화는 다른 밑반찬을 잔뜩 차렸다. 백호파 식구들의 젊은 시절을 복고풍으로 그리는 회상장면이 대표적이다. 자연히 분장과 세트 등은 전편보다 공들인 기색이 역력하다. 반면 결정적 승부수인 코미디의 맛은 전편보다 심심해졌다. 유머의 상당수가 전편에서 이미 맛본 것의 재판인 탓이다.

■ 라디오 아날로그와 디지털 … 세대 공감을 위하여

'The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팝송이 이미 1980년대 초에 나왔으니, 라디오는 확실히 올드한 매체. 그래서 이 영화도 올드할 걸로 지레 짐작하면 섭섭하다. 라디오 프로가 인터넷 덕분에 전국적인 인기를 얻는다는 줄거리처럼 아날로그.디지털 세대를 고루 겨냥한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잠복해 있다. 여전히 왕자처럼 구는 퇴물가수 최곤(박중훈)과 그 뒷바라지에 청춘을 바친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최곤이 강원도 영월의 작은 방송국에서 제멋대로 진행하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가 뜻밖에 히트를 친다. 다방 아가씨의 절절한 육성을 비롯, 진짜 '사람 사는'얘기를 등장시킨 덕분이다. 영화음악 역시 다세대용이다. 신중현의 '미인'과 신세대 밴드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가 고루 흥을 돋운다.

■ 가족계획 되돌아 본 1970년대 … 피임 홍보 정부 요원

'둘만 낳아 잘 기르자''둘도 많다'는 구호가 방방곡곡 메아리쳤던 것이, 과장법을 섞으면 불과 엊그제의 일이다. 영화의 무대는 가난 탈출을 위한 지상과제로 정부가 가족계획을 추진하던 1970년대 초. 인공피임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시골마을에 정부요원 박현주(김정은)가 파견된다. 순박한 농민 변석구(이범수)와 짝을 이뤄 펼치는 능청스러운 입담이 코미디의 핵심이다. 정부시책을 너무 열심히 따르려다가 마을은 오히려 비극적인 위기에 처한다. 여기까지도 좋은데, 최종 결말은 다소 생뚱맞다. 전반부 잘 만든 코미디의 점수를 갉아먹는 격이다.

■ 엽기서커스 1000년에 단 하루, 사람의 간을 먹는 …

구미호가 납량특집이 아니라 추석영화에? 이 뜻밖의 상황처럼 이 영화는 통념만으로 소화하기 힘들다. 구미호의 식성 역시 1000년에 단 하루만 사람의 간을 먹는다는 설정이다. 이들이 특기를 살려 서울 한복판에 서커스 천막을 차렸는데, 서커스의 내용이 퍽 엽기적이어서 오던 관객도 쫓을 정도다. 때마침 벌어진 연쇄살인극의 범인으로도 의심을 받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곳곳에 춤과 노래가 등장하는 뮤지컬이라는 점. 전경.시위대의 대결을 비보이의 현란한 춤 대결로 묘사하는 장면에서 보듯, 충무로에서 보기 힘든 시도가 신선하다. 반면 줄거리와 인물의 설득력은 느슨해서 관객의 호오가 크게 갈릴 듯하다.

■ 눈물 선선한 가을 … 원 없이 울고 싶은 이들에게

다른 경쟁작보다 앞서 개봉해 이미 많은 관객이 눈물의 순도를 맛봤다.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오다 강도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된 남자 윤수(강동원)와 중산층 가정에서 가족과 벽을 쌓고 살아온 여자 유정(이나영)이 서로의 상처를 나누는 이야기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이 영화의 결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도, 그 과정에서 두 청춘스타가 빚어내는 감정의 격류가 강렬하다. 원작은 소설가 공지영의 베스트셀러다. 사형제도의 타당성을 원작소설만큼 본격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감성적인 호소력은 상당하다. 선선한 가을 바람 속에 원없이 울고 싶은 관객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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