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68)길없는 길-내 마음의 광국(6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최인호 이우범 화
나는 그 상자의 뚜껑을 보자 약간 망설였다. 그 작은 상자 속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잔해가 나를 두렵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육신의 모든 것이 태워지고, 뼈마디는 절굿공이로 빻아져 사라진 후 마지막 남은 몇 줌의 뼛가루가 작은 상자 속에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어머니의 전부였다. 나를 열달동안 뱃속에서 기르고 나를 안고 젖을 먹이던 그 어머니가 이 상자 속에 들어 있음일까. 기구한 팔자의 어머니 운명이 이 작은 상자 속에 압축되어 들어 있음일까.
나는 상자의 뚜껑을 벗겨 내렸다.
상자 속에는 정제(정제)된 분골이 들어있었다. 빛깔이 너무 희었으므로 태운 육신의 잔해라기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리고, 태우고, 건조시켜서 얻어낸 순도(순도) 높은 결정당(결정당)처럼 느껴졌다.
분골함을 들고 그 속에 손을 찔러 넣었을 때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뼛가루 속에는 따스한 체온조차 깃들여 있지 않았다.
이것이 내 어머니인가.
살아있을 동안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였던 내 어머니인가. 살아있음을 부정하고 내게 어머니란 실체는 아예 없는 것이라고 애써 생각하여도 언제나 내 곁에 살아 존재하였던 어머니. 살아있을 때 그 많은 사내들과 정을 나누고, 육체를 나누고, 그 떨리는 쾌락에 신음소리를 내던 어머니의 육신인가. 그 육신이 이렇게 초라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어머니의 뼛가루를 한줌 움켜쥐고 아버지의 무덤가에 힘껏 흩뿌렸다. 소나무 숲 사이로 숨어들어 온 거친 봄바람은 뼛가루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오후가 되자 황사의 바람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온 숲과 나무들은 사정없이 불어오는 바람으로 활처럼 굽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무덤가를 돌면서 흩뿌리는 어머니의 뼛가루를 손에서 던져지기가 무섭게 가로채가고 있었다.
살아 생전 가장 소중하게 여겨졌던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살아있을 때 열여덟 명의 부인 속에도 끼지 못하였던 어머니는 이제 이 지상에서의 인연으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어 가는가 그 방향을 알지 못하듯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 가는 곳을 알 수는 없으나 어머니의 육신만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물에서 나왔으니 물로 돌아가고, 불에서 나왔으니 불로 돌아가고, 바람에서 나왔으니 바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네 가지(지수화풍)가 모여 육신을 이루었다면 이제 그 육신이 죽어 제각각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