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7)늘푸른 소나무-제3부 범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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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김원일 최연석 화
아니나 다를까, 오후에는 면회가 있었다. 석주율도 호명이 되어 면회장으로 불려 나갔다. 역시 주율이 예상한 대로 백운거사 배경준과 선화였다. 백운거사는 두루마기 차림이었고, 선화는 검정 모직 치마저고리였다. 검정 옷을 받쳐입은 선화의 흰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이제 스물넷의 나이로 어엿한 숙녀가 된 선화의 얼굴에 살이 도톰하게 올라 그 피어난 모습이 박 속 같았다.
『그저께 저녁에야 통기가 와서 언양 부모님께는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사온지요?』
선화가 주율을 바라보면 물었다. 그 표정은 냉랭하기만 할 뿐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외역에 뽑혀 감옥을 떠나게되어 감옥소 측에서 그렇게 연락을 했나 봐. 저들 말로는 글피쯤 떠난대. 뽑힌 자가 모두 마흔 명인데, 어디로 팔려갈는지는 알 수가 없어. 내 짐작으로는 어디 심산유곡 산판의 벌목이나 목도에 동원되는 것 같기도 하구…』
『건강은 괜찮아요?』
『그래. 여기 있기보다 노동을 함이 마음으로는 더 편한 것 같아. 잘 됐다는 생각도 들어. 』
오누이가 나누는 대화 사이에 배경준이 끼여들었다.
『석형, 이제 형기가 일 년 남짓 남았으니 몸 조심하구려. 그곳에서 인편에라도 서찰을 전할 수 있다면 피봉에다 동래군 읍내 등장대 아랫말 「현현역술소」로 적으면 됩니다. 제가 한번 찾아 나서리다. 모쪼록 마음을 굳게 가져 이번 난관을 잘 이겨내야 하오. 석형의 괘를 보니 구(구)가 나왔소. 이는 흉괘(흉괘)이니 과거 절에서 그랬듯, 모쪼록 정도(정도)로 나아가시오. 그러면 곤란을 극복하리다. 』
그 말에 달아 선화가 낭랑하게 읊조렸다.
『오라버니는 여자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강대한 자는 이길 수 있으나 심약한 자는 쉬 의지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락으로 떨어져 헤어 나오기가 심히 난처합니다.』
석주율로서는 배경춘의 말은 그렇다치고, 선화의 말은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었다. 표충사에 있을 대 역경(역경)도 한 차례 훑어보았으나 그 심오한 뜻을 깨우치기에는 자신의 실력이 달렸다. 그런데 장님 주제에 몇 년 역을 익혔다고는 하나 그 단정적인 말이 너무 당돌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더욱 저자거리도 아닌 철창 신세를 지고 사는 마당에 여자라니. 설령 벌목에 동원되더라도 그곳에 여자가 있을 리 없었다. 또한 자신이 그쪽 세계와 부관한지도 오랜 세월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선화의 말이 황당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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