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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는 정말 이겼는가/김상기 자유기고가(논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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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소련과 동구에서 벌어지는 역사의 드라마는 제행무상의 인간사를 생각하게 한다.
동독에서 기민당이 승리하더니,헝가리에서는 공산당이 8%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소련에 병합되기전에 파시스트 나라였던 발트해3국,특히 리투아니아는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나라로 둔갑했다. 폴란드에서는 부패의 자유가 만발하여 뇌물만 주면 국가소유의 공장을 3분의1가격으로 외국자본에 팔아치운 적도 있다.
스탈린격하운동의 과정에서 반유대주의가 소련과 동구의 도처,특히 체코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 유대인들이 스탈린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반유대주의를 만끽할 자유,소수민족을 박해하는 주체성이 민족자결 민족자존의 탈을 쓰고 퍼질 모양이다.
한편 서방에서는 「거대한 실패」라고 기고만장하여 떠들어댄다. 뇌골이 한돈쭝도 채안되는 아이들까지 나서서 『싸움은 끝났다. 자유주의가 승리하여 드디어 역사 그 자체가 끝났다』고 횡설수설하고 있다.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신문ㆍ잡지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더 헷갈린다.
차라리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을 읽는 것이 생각의 가닥을 잡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니콜라스 베르자예프가 도스토예프스키 변증법의 정점이라고 격찬한 『대심문관』의 1장은 정치신학의 백미다.
이반 카라마조프가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자작 산문시는 신에 대하여 반역하는 인간의 이야기이자 역사에 있어서의 이성의 자기변호다. 작중 인물 이반이 지어낸 추기경의 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2중의 거리를 두고 우리에게 펼치는 그의 호신론은 초월적 진리인 자유와 이 세상의 빵의 투쟁에서 지상의 권능이 파산하는 것을 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매일 백여명의 이단자를 불태워 죽이는 종교재판이 한창이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빌리아에 그리스도가 잠시 나타나자 추기경은 그를 즉시 체포하여 감옥에 처넣고 그가 화형에 처해져야 마땅한 근거를 준엄한 논리로 펼친다. 그리스도의 죽을 죄는 무엇인가. 우열한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스도의 죄는 인간과대평가죄다.
정박아보다 나을 것 없는 몽롱한 지성에다 성정마저 황음한 인간에게 왜 선악을 구별하고 선택하는 양심의 자유를 주어 추기경의 일을 방해하는가. 천년이 넘도록 자유사상의 혼란,과학의 혼란을 겪게한 결과 결국 인육상식의 파국으로 치닫게 되지 않겠는가.
자유와 사랑의 복음을 죽이고 철권의 강압으로 세상을 바로잡아야 인간이 행복해질수 있다고 추기경의 논고는 결론짓는다.
기독교의 역사가 인간의 희망을 저버렸듯이,사회주의가 이룩하려던 인간해방의 꿈도 결국 난파할 수 밖에 없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내다 보았다.
사회주의는 인간해방과 정반대의 길,전체주의 권위주의의 길로 나아갈수 밖에 없는 전도의 필연성을 그 속에 품고 있으니,그 이유는 인간이 자유도 빵도 함께 고루 나누어 가질수 없을 만큼 사악하기 때문이라고 추기경은 말한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고원한 이상과 스탈린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잘못을 고쳐주는 추기경의 말에서 그 참모습이 드러난다.
채워질 수 없는 빵에 대한 욕심,자유롭기 보다는 양떼처럼 무리지어 노예처럼 굴종하며 기도드리지 않으면 못견디는 인간들은 기적과 신비,그리고 권위에 의하여 다스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 숨어있던 사제들이 나서서 그리스도가 거부했던 사탄의 세가지 권능으로 노예들을 다스려야 한다. 이들로 하여금 어린이가 되게 하여 노래하고 춤추게하라. 이것이야말로 자유를 버리고 나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행복이라고 추기경이 무신론을 편다.
참담한 고뇌속에서 귀를 기울이던 알료샤는 이반의 얘기가 끝나자 시에서 그리스도가 추기경에게 했듯이 이반의 입술에 키스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대심문관의 도덕적 파산을 이반의 산문시를 통해 보여주려 했다면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스도가 자유의 화신이요 초월 그 자체라면 추기경은 역사발전의 법칙을 따라 정치권력을 집행하는 자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궁극적으로 불합리한 인간의 문제가 정치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믿었기에 혁명도 합리주의도 미련없이 버리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그의 길을 함께 갈 수 있는가.
스탈린ㆍ모택동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변해가건 소련혁명,중국혁명의 위업을 폄훼하는 것은 보혁 이데올로기의 문제이전의 지적성실성의 문제다. 극도의 억압과 테러를 불사하며 빵과 자유를 고루나누어 가지려고 싸운 집단적 체험은 요즈음의 실망스러운 사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보다 실현성있는 이상으로 발전하여 미래의 새 지평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우리시대의 추기경들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었고 인민을 어린이처럼 노래하고 춤추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래에서 마이크로칩을 만드는일을 소홀히하여 노래와 춤에 실증난 어린이들에게 「닌텐도」(전자오락게임)를 주는일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자 구치ㆍ크리스천 디오르 등 요상한 이름의 바이러스가 주교를 비롯한 모든 사제들과 어린이들을 감염시켜 병이 고황에 들어가니 관능과 말초신경의 뭉치같은 서방인들이 「자유의 승리」를 외치고 있다. 이 「자유」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자유가 무슨 관계에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조시마신부가 사회주의의 파산을 선고한다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상품소비와 말초신경자극 밖에 능사가 없는 「자유인」은 추기경의 「거대한 실패」앞에서 겸허할줄 알아야 한다. 소비와 자극이 앞서 있다는 것은 결국 권태와 절망에 더 깊이 함몰되어 있음을 뜻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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