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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불붙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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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18은 진보적 학계에「보다 구체적인 사회변혁운동의 이론화」라는 과제를 남겼다. 그리고 진보적 학계는 5·18이후 10년간 이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 그 과정에서 진보적 학계는 「민중민주주의」와「반외세 민족자주」라는 사회운동의 양대 지표를 제시했다.
5·18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각 사회 계급·계층의 태도와 활동은 진보적 학계에 계급분석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무력진압」이라는 결과는 군부와 미국의 개입여부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 결과 사회운동의 주체인 「민중」의 개념(노동자·도시빈민)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됐으며,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미국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80년대 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5·18이 학계에 미친 영향과 학계의 5·18에 대한 연구경향을 요약, 소개한다.
◇5·18이 학계에 미친 영향〓5·18은 70년대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80년대식 연구경향을 낳았다.
80년대의 대표적 특징은 형식면에서 진보적 연구단체의 결성·연합이며, 내용 면에서 사회성격을 둘러싼 대논쟁의 전개였다.
진보적 연구단체의 효시는 84년7월 결성된 「산업사회연구회」. 이후 역사학분야의 「망원연구실」등 인문·사회과학전반에 걸친 연구단체들이 만들어졌다.
이들 진보적 학술단체는 88년 「학술단체협의회」라는 연합체를 결성했으며, 89년에는 지방의 진보적 학술단체들이 모여 「지역사회연구협의회」를 만들어 학술운동의 조직화가 일 단락됐다.
이러한 진보적 학계의 최대 관심사는 「한국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 같은 의문의 출발점은 5·18이 보여준 민주화운동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즉 진보적 학계는5·18을「좌절된 민중항쟁」으로 보고 5·18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 우리사회의 실상을 분석하며, 나아가 보다 성공적인 민주화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를 추구하게된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사회구성체 논쟁」이다. 이 논쟁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학생운동과 재야운동권의 이론적 근거로 우리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왔다.
85년부터 불붙기 시작한 사회구성체 논쟁은 간단히 말해 한국사회 성격 규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력이 국가와 국내 독점자본인가, 아니면 미국·일본 등 외세와 외국자본인가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5·18에 대한 연구〓5·18 자체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아직 본격화되지 않고 있다.
최근에 나오고 있는 관련서적들도 대부분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자료집에 불과하며, 학문적 접근을 보인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도 아직은 「시론」에 불과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출판된 자료집은 당시 관계자 17명의 증언을 모은 『광주여 말하라』(실천문학사간)와 정상용·이해찬 등 정치인과 소장학자들이 당시의 정세를 다큐멘터리식으로 재구성한 『광주민중항쟁』(돌베개 간)이며, 학술적 연구서적으로는 『광주민중항쟁 연구』(사계절 간)가 있다.
이같이 5·18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정부측이나 미국의 관계자료가 아직 완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큰 이유는『5·18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진보적 연구자들의 공동인식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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