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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칼럼

글로컬로 가는 한국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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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가 세계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통신과 이민.경제교류 등으로 세계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회는 거의 없다. 세계화는 경제적 부와 정신적 개방의 원천이 됐다. 이제 세계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행운이 아니다. 그러나 문화에는 그런 세계적 문화가 없다.

분명히 많은 행동양식과 관습이 한 사회에서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는 해당 지역 문화를 때로는 부정적으로, 때로는 긍정적으로 바꾼다. 새로운 관습은 상당 부분 유럽에서 나왔고, 일부는 아시아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훨씬 많은 부분이 미국에서 왔다. 세계 문화의 미국화는 지역 문화에 대한 도전이다. 더구나 이런 미국화는 미국 문명과 구분돼야 한다. 미국 밖에서 접하는 미국 문화는 대부분 오락 채널을 통해 전달되는 대중문화다. 그러나 이런 낮은 수준의 대중문화는 진정한 미국 문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지역 문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화에 저항하고 있다. 한국은 특히 저항이 강한 편이다. 아시아의 이웃 국가들과는 물론,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그렇다. 그러나 이를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확립하는 한편 타문화와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큰 포용력을 보여 왔다. 한국의 세계화는 동시에 다른 나라들에 의한 한국적 가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기존에 한국 문화를 얕잡아봤던 일본.중국 등이 그렇다. 한류(韓流)는 중국.일본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퍼져나갔고, 이제 유럽.미국에서도 시작되고 있다.

한국 문화의 힘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근대화 과정에서 핵심 요소였다. 민주주의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지 않고선 건설될 수 없다. 미래에는 이런 가치 공유가 한반도의 통일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가치 공유는 경제적 근대화에서도 필수적이다. 산업화.수출을 위한 한국의 단결을 가능케 한 것도 바로 문화다.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는 세계 시장에서의 경제적 성공에도 결정적 변수였다. 처음에 한국 제품은 단지 값이 싸기 때문에 팔렸다. 그러나 점차 좀 더 정교한 상품.서비스가 '한국산'이라는 이유로 팔리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산은 믿을 만하고 미적으로 우수하다는 두 개의 가치를 의미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문화는 곧 가치를 뜻한다. 국제사회에서 프랑스는 호화롭고 풍족한 삶과, 미국은 기술적 진보와, 독일은 견고함과 동의어다. 따라서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보강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한국 문화가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은 한 세대가 채 되지 않았다. 그동안 한국적 가치는 좁은 민족 문화에서 세계화의 단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한류는 아직까지 낮은 단계의 대중문화에 머무르고 있다. 중국에서 인기 있는 한국 대중음악은 미국식 리듬을 아시아식으로 포장한 것이다. '겨울 연가' 등 일본에서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는 단지 미국식 사랑 이야기를 아시아적 외형으로 포장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 한국적 가치를 수출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의 한류만큼 고급 문화도 중요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전통 규범과 근대성.세계화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문열의 소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전수천의 설치미술, 심문섭의 조각, 임권택의 영화, 이영희의 한복 패션 디자인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이들은 한국 문화를 진정 글로컬('세계적인 동시에 지역적인'이란 뜻으로 global과 local의 합성어)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글로컬한 문화는 지역적 뿌리를 가진 동시에 전 인류를 위한 세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가치 공유와 상호 이해가 바로 민주주의와 평화의 주춧돌이다.

기 소르망 문명비평가

정리=김선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