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렁동개」 폭언 브레슬린 정직처분의 의미|인종차별주의들에 〃각성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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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776년 발표된 미국독립선언문은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30여년전 존슨대통령은 『타인종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어느 인종을 가두어놓는 무서운 벽은 붕괴되어야 한다』고 웅변을 토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과 웅변은 적지 않은 미국인들에 의해 끈질기게 부인되고 거부되어온게 현실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칼럼니스트 지미 브레슬린 물의는 이 현실을 명확히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뉴스데이지의 칼럼니스트며 퓰리처상수상자인 지미 브레슬린(궤)은 동료여기자인 재미교포 여지연씨 (25)에게 개도 입에 못 담을 욕설을 퍼부었다.
점잖다는 정평이 나있는 뉴욕타임스의 7일자 보도에 따르면 브레슬린은 편집국에서 중인환시리에 여기자를 가리켜 『누렁똥개(Yellow Cur)』『(동양인에 대한 경멸적 영어표현인)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 것 (Slan-Eyed)』이라고 호칭하는가 하면 「신체부위에 관한 음란한 표현」도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물의의 발단은 지난주 그의 여성모독성 칼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뉴욕시 의회대의원으로 선출된 그의 부인을 예로 들면서 가사를 등한히 하기 십상인 공직여성들을 증오한다고 이죽거렸다.
이 내용이 여성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차별주의라고 생각한 동지의 뉴욕시 한 지국주재기자인 여씨가 컴퓨터를 통해 항의하자 브레슬린이 동료들이 듣는 앞에서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뉴스데이지는 브레슬린이 여기자와 동료들에게 각각 사과문을 보낸 조치로 이 물의를 마무리지으려 했다.
그러나 8일 브레슬린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한 라디오 대담프로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 이번 사건에 관해 농을 주고받는 등 계속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회사로서도 어쩔 수 없이 9일 그에 대해 2주 정직조치를 취했다.
이번 사건은 지난 한주일 동안 미 언론에 의해 크게 다뤄졌다. 기사 중에는 브레슬린에-대한 옹호도 있다. 워싱턴포스트지 칼럼니스트 토니 콘하이저는 브레슬린의 언행이『추하고 저속하고 개탄스럽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고 비판했다.
그러나 브레슬린은 투사형언론인으로서 민권운동을 지지하고 AIDS환자에 대한 동정에 앞장서는 등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언론인이었다고 콘하이저는 설명했다. 더구나 본래 험구인 브레슬린이 형편없는 욕설을 입에 담은 것은 사실이지만 공공장소가 아니고 마치 가족같이 허물없는 분위기의 편집국 내에서 이루어진 일이니 만큼 이 정도선에서 용서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번 사건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같은 옹호론의 정당성 여부보다는 사건에 대한 여론과 관심도가 예상외로 큰 점이다.
경제적·정치적 인종차별과 심지어 이번 같은 폭언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종편견에 대한 미국의 예민성 내지 죄의식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콘하이저가 『만약 신문사 편집국내 기자와 편집자들의 험구를 이유로 해고한다면 남아 있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것』 이라고 말했지만 뉴스데이지 기자들 50여명이 연판상을 만들어 브레슬린의 인종편견 언행에 대한 응징을 회사측에 요구한 거사적 행동은 인종차별과 편견에 대한 미국인의 예민한 자의식의 표현인 셈이다.
더구나 근래 수년간 이루어지고 있는 아시아계의 눈부신 등장을 둘러싸고 미국은 새로운 인종문제를 경험해온 터이다. 아시아계가 비록 미 전체인구의 2.4%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미국 내에서 최고속도로 성장하는 소수민족으로 부상하고 있다.
하버드대 대학원생의 17.1%, 매사추세츠공대(MIT)의 18%,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의 27.3%는 아시아계 학생이며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대는 아시아계가 35.1%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과 관련, 아시아계에 대한 질시와 배척이 이루어지고 텔리비전 코미디에서 동양인에 대한 비하가 심심치않게 나타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브레슬린사건에 대한 미 여론의 큰 관심표명에서 읽을 수 있듯 미국인의 천성적 인종편견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훨씬 덜한 것 같다.
최근 영국의 한 신문은 만년 홍콩의 중국반환 후 홍콩 5만명을 영국에 이주시킨다는 대처총리 계획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반대가 65%였다.
브레슬린에 대한 뉴스데이지의 인사조치는 인종평등을 거부하는 일부 미국인에 대한 상징적 각성제로 여겨진다.
【워싱턴=한남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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