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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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미국 역사박물관 3층의 대통령 전시실. 수백개 진열품 중 작은 필기 도구함에 나의 시선이 멈췄다. 그 설명문을 읽는 순간 짜릿한 감흥이 일었다. '체스터 아서 대통령이 사용했다는 펜 스탠드(pen stand)'-. 아서 대통령은 미국인들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고풍스럽지만 강렬한 맛이 없는 그 유품을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의 감수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의 재임 중에 조선과 수호통상조약(1882년)을 맺었기 때문이다. 조약과 관련한 서명을 그 펜으로 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조선은 중국(청나라)과 일본의 간섭, 굴욕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미국을 활용해 중국의 구역질나는 거드름을 견제하려 했다. 미국에 보빙(報聘)사절단이란 외교단을 보냈고 그들을 만난 대통령도 아서다. 그 펜에는 가난한 약소국의 실낱 같은 희망과 회한이 사절단이 내민 서류에서 옮겨져 남아 있는 듯했다.

중국의 위세가 한반도 전체에서 다시 살아났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해 이 땅에서 물러난 지 거의 1백10년 만이다. 한반도의 북쪽은 한국전쟁 때 참전으로 입김을 되살렸다. 지금 남쪽에도 중국의 영향력은 복원되고 있다. 물론 한 세기 전과는 위력과 형태가 다르다. 그러나 외교.군사에서 중국의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지난 50년에 비하면 엄청난 정세변화다.

북한 핵을 놓고 노무현 외교의 무능함이 쌓이고, 권력 핵심과 추종 지식인들이 반미를 부추기는 사이에 그렇게 됐다. 미국과 힘을 합쳐 북한을 압박하고 설득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과 기회를 포기해버린 뼈아픈 대가다. 미국과 멀어지려는 중국 대안론은 盧정권 내부에 퍼져 있다. 이제 중국은 북핵의 해결사로 한반도 질서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88서울올림픽과 함께 우리가 당당하게 중국에 들어간 지 15년 만이다. 그동안 베이징(北京)에서 고급 중국요리를 먹고 만리장성을 구경하면서 일부 한국인은 중국을 깔보았다. 이런 모습은 수천년 한.중 관계에서 처음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 역사의 반전(反轉)에 따른 쾌감도 맛보았다. 우리를 멸시했던 역사에다 한국전쟁 때 총부리를 들이댔는데도 중국이 미국보다 괜찮게 느껴진다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문화적 동질감, 지리적 인접성도 있겠지만 콤플렉스 해소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경제 발전과 안보 덕분이었다.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중국 지도자들은 한국의 성장을 배우려 했다. 한.미동맹 덕분에 중국은 우리를 넘보지 못했다.

그런 호시절은 사라졌다. 강성 노조.규제.정책혼선으로 한국에서 기업하기 힘들어졌다. 중국으로 떠난 일자리가 10만개라고 한다. 경제가 골병이 든 것이다. 한.미동맹은 여기저기 상처가 나있다. 이라크 추가 파병 결정으로 나아지겠지만 과거 수준의 유대는 회복하기 어렵다. 반면 중국은 올해도 10% 고도성장을 이룬다고 한다. 유인 우주선 선저우 5호의 발사 성공으로 군사.과학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중국은 기회이고 경계의 대상이다. 그 양면을 효과적으로 조율하려면 국제관계의 우선순위를 정확히 재단해야 한다. 중국 대안론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사의 주류에서 이탈하겠다는 한심한 발상이다.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은 중국.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우리의 수단을 포기하는 짓이다. 한.미동맹의 틀을 활용하면서 그 속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유연하게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 한.중관계가 건강하게 지속된다. 중국의 거대한 내수시장이 우리의 부담없는 기회로 남을 수 있다.

(워싱턴에서) 박보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