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정치와 돈: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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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심증가나 내막은 「영영 미궁」/서로 “입열면 끝난다” 의혹만 남겨(주간연재)
『그렇게 싹 입을 씻을 줄은 몰랐습니다.』
민자당의 내분 와중이던 지난달 민자당 민정계의 한 중진의원이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내뱉은 말이다.
민주계와 김영삼최고위원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다가 이야기가 합당전인 지난해말의 정치자금 배분에 얽힌 사연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 경제단체가 지난해 12월 산하기업들로부터 총1백억원의 자금을 거두어 당시 4개 정당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물론 선관위에 기탁하는 공식 정치자금은 아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백억원을 거둬 여ㆍ야당의 의석비로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니 대충 민정당에 45억,평민당에 25억,민주당에 20억,공화당에도 10여억원이 각각 돌아갔다는 얘기.
그런데 올들어 합당이 전격 발표되고 3당의 재산내용에 대한 실사가 시작되자 구 민주당은 『한푼도 남는 게 없다. 은행빚을 생각하면 오히려 적자일 것』이라고 발뺌하더라는 것이 「입을 싹 씻은」사연의 전말이다.
이 중진의원은 구민정당의 경우 받은 돈은 당 금고에 들어갔고 이것이 합당자금으로 쓰여졌으나 야당은 아예 몇사람의 개인 호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백억원 모금설은 여야4당이 모두 관련된 데다 은밀히 모금된 것이어서 사실로 드러나면 큰 파문이 일겠지만 어느 누구도 시인하려 들지 않아 공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정치자금의 속성이고,정경유착의 뿌리도 이 은밀함을 양분으로 커온 것이다.
기업이 반드시 살아남기 위하여 정치권에 돈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기업의 속성상 더 큰 이윤이 보장만 된다면 달나라에도 지금 당장 투자할 터인데 하물며 정치권에서랴. 상당한 돈을 들여서라도 입법정보를 알아내고 정책의 새로운 전환의 기미를 감지하거나,중요정책 부서의 인사이동 정보를 일찍 입수해 대처할 수 있다면 그같은 기회를 못잡는 것이 오히려 아쉬울 것이다.
모 그룹 기조실의 한 간부는 『중앙부처서기관(과장)급중 유망하고 똘똘한 사람을 물색해 반응을 보아가며 여러가지 호의를 표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아예 「자기 사람」을 심어두자는 거시적 안목에서다.
지난해 12월31일 국회증언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은 재임중의 정치자금문제에 대해 『기업 또는 개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기부받은 바 있다』면서도 『자칫 정치불신만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기 싫다기 보다는 입을 열게 됨으로써 과거청산의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고,과거의 수렁에 빠져 헤어날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며 구체적 언급은 피했다.
전씨는 또 『조성된 정치자금이 특정 야당에 지원돼 야권분열을 조장했다는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는 『특정인에게 「본인이」 정치자금을 준 사실이 없다』고 증언,「본인」이 아니고 대리인을 통한게 아니겠느냐는 의혹을 주기도 했다.
정경유착이 어떤 계기를 만나 사건화한 경우로는 지난 52년의 중석불사건을 비롯,원면사건,국회외교분과위원장이 개입한 국제시계밀수사건(56년),부정축재조사단이 뇌물을 받은 사건(61년) 등과 비교적 최근의 세칭 장영자ㆍ명성ㆍ영동 진흥개발사건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많은 국민들은 이들 사건의 정확한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일본에서도 59년의 인도네시아 배상관련추문부터 구두룡댐사건ㆍ무주철도사건(61년),취원산업사건(65년)ㆍ공화제당사건ㆍ일본통운사건(66년)에서 최근의 록히드사건ㆍ리크루트사건까지 정국을 흔드는 사건들이 있었다.
지난해 12월에는 현 부총리인 구민정당의 이승윤의원과 서정화의원이 인천상의측의 알선으로 상공인이 아니면서도 H투자신탁의 이 지역출신 상공인지분 주식 3만주씩을 배당받은 일이 터져 한때 「한국판 리쿠르트사건」이 아니냐는 긴장감까지 당내에 돌았으나 이의원등이 재무부의 유권해석에 따라 배정즉시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밝혀져 해프닝으로 끝나기도 했다.
돈이 있어야 정경 유착을 시도할 수 있는 만큼 우리나라의 경우 전경련이나 경단협에 당연히 따가운 시선이 쏠리게 마련이다. 전경련이 비오너체제의 불협화음을 씻고 지난 2월 김준성 전부총리를 고문으로 영입한 데 대해서도 「정경유대강화책」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전경련은 『특정 정당에만 후원할 경우 오히려 선거에서 표를 잃게되고 정경유착의 오해만 산다』며 자민당에 집중지원하는 일본의 경단연과는 다른 역할을 주장한다.
그러나 토지공개념제 완화나 4ㆍ4경제활성화 조치의 금융실명제유보,나아가 3ㆍ17개각(조순경제팀 퇴진),지자제연기 등에는 경제단체들의 바람이 대폭 반영됐다는 지적이다.
최광교수(한국외국어대ㆍ경제학)는 전경련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지원으로 집필한 「한국의 지하경제에 관한 연구」논문에서 『정치자금 시장에서 정치가들은 만성적인 자금부족 상태이기 때문에 자금공급을 어렵게 하는 방법은 제거하거나 반대하게 된다』며 『금융거래 실명제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도 정치가들의 생명선인 정치자금의 마련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87년 씌어진 이 논문의 지적은 올들어 실명제가 또 유보됨으로써 입증된 셈인데 최교수는 『원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어려운 법』이라며 정경유착의 깊은 뿌리를 걱정했다.<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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