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진보 갈등 … 그것 참 지겹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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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씨가 집 앞 미라보 다리 위에서 센강과 에펠탑을 바라보고 있다. 황씨는 이곳을 매주 서너 차례 산책한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황석영씨는 유럽에 산 지 3년이 다 돼가고, 정치는 거리를 두고 봐왔기 때문에 그 실체를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살아있는 지성'으로서 한국의 여러 현실문제에 대해 나름의 진단과 처방을 쏟아냈다. 다음은 일문일답.

■ 현 정권의 성격은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 하면 웃을 일
대북 주도권 외쳤지만 일관성 없어

◆ 한국 정치와 사회 갈등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로 갈려 사사건건 맞붙는 현실을 어떻게 평가하나.

"그것참, 지겹더라. 나는 한국의 사회구조를 서구에서와 같이 진보와 보수로 구분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한국의 진보 또는 좌파라 해봤자 서구식으로 보면 자유주의거나 노동조합 수준일 테고, 보수나 우파 쪽도 다른 의미에서의 구 기득권층이나 군부독재 시절의 파시즘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꼭 집어서 개혁에 관한 내 생각을 말하자면, 혁명이 아니라면 개혁이란 합리적 보수의 숫자를 늘려가는 것이다. 중도적인 사람이 많이 늘어나야 과거 독재 시절의 상흔을 치유하고 튼실한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겠다는 것이다. 상식이 저절로 이끌어 가는 사회가 편안한 사회다."

-올 5.31 지방선거를 비롯한 각종 선거에서 여당이 잇따라 패배한 뒤 진보 진영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는데.

"여당은 탄핵 국면 덕분에 국민의 기대와 지지 속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제는 당연히 자신을 선택한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위기 의식이 있다면 좋은 일이다. 반성하게 될 테니까. 돌아보면 사회는 나선형으로 돌고 돌면서 나아지는 것 같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문제가 뜨거운 이슈인데.

"전작권 문제는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어야 마땅하지만, 생길 때나 지금이나 주인인 우리에게 있지 않다. 달라고 해서 순순히 내놓을 상대도 아니고,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해도 고분고분 쥐고 있을 것도 아니다. 국제적으로 주권을 가진 나라의 시민으로서 전쟁에 대한 권한을 외국이 쥐고 있다는 것은 수치이기 이전에 생존권의 문제다. 새로운 사안은 이라크 파병을 계기로 불거진 주한미군의 기동군 편제로의 전환이다. 살펴 보니 우리 땅은 한반도 안보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총괄하는 미군기지로 변하는 듯하다. 그러면 동맹국으로서의 한국군의 작전 개념도 달라지는 것이다. 해외 주둔 미군의 재편성, 기지 이전과 전작권 이양 문제 및 무기 교체 등은 모두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 분명하다."

◆ 이념 갈등 해법

-복지 국가의 대명사로 꼽히던 스웨덴에서 그런 복지제도를 만든 집권 중도좌파가 총선에서 패배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유럽 복지 시스템의 위기는 동유럽과 구 식민지에서의 노동 이동이 첫째며, 미국식 시장 질서가 잠식한 것이 다음이다. 프랑스나 독일의 중산층은 과거에 비해 많이 불안해졌다. 시장은 그저 삶의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던 보통시민도 불안하게 시장적 경쟁과 고용의 방식을 긍정하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와 같은 이념 문제라기보다는 불안한 이행기 속에서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현 정권을 '좌파 정권'이라고 하는 데 동의하나.

"보수와 진보, 좌우가 엄정한 영국에서도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을 좌파 정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웃는다. 정책에 의해 변질한 것이다. 나도 현 정권과 여당을 좌파라고 하면 웃을 것이다. 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대내외 정책이 보수 정당의 그것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민노당이 좌파인가 하면, 근래의 변화로 보아 그것도 웃을 얘기다. 그래서 내가 수년 전에 이문열씨와 대담하면서 우리 서로 수평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좌우로 나뉜다면 당신은 한나라당 말고 열린우리당을 지지하고, 나는 민노당으로 움직이겠노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그러나 다시 수정해 지금 말하라면 외국인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편에 서야 좌파라고 말하겠다. 그러니 한국의 좌파는 아주 소수일 게 뻔하다."

■ 과거사 규명
과거는 아픈 상처지만 확인할 필요
그렇다고 다시 처벌해서는 안 될 것

◆ 역사 인식 문제

-현 정부 들어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신설돼 일제시대의 친일과 유신시대의 인권탄압 등을 재조사하고 있는데.

"과거는 아픈 상처지만 환부를 확인할 필요는 있다. 그래야 치료를 할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처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주변국의 역사왜곡이 한국을 피곤하게 하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 같다. 아시아를 보면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가 어째서 허구인지 알게 된다. 세계화란 냉전 이후 미국의 패권주의를 은폐한 말이기도 한데, 일본은 예전처럼 바다 쪽 세력에 기대어 호가호위하려 하며, 중국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옛날 한(漢)제국 이래의 중화를 꿈꾸고 있다. 한반도의 긴장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아니지만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견제는 사실상 한반도에서의 긴장 고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일본의 집요한 독도 도발은 대내적으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처럼 '보통국가'로 변환하기 위한 정치적 명분 쌓기의 일환이며, 대외적으로는 남북 평화체제를 추구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견제가 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사실 일본에 여러 가지로 호재로 작용했다. 중국은 미국처럼 한반도의 분단을 경영하면서 그 틈새를 이용해 국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또 중국과 미국은 북한과 대만 문제로 서로 적대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속어 딱 그대로다. 우리가 어째서 북한이 붕괴하지 않도록 도와 주고 담론을 끌어내야 하는지 이제 분명해진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 부동산 정책
내가 2년 전 판 땅 20배 뛰었다니 …
이런 실정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나

◆ 노무현 정권의 정책

-노 정권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대북 문제에서 자주적인 주도권 운운하며 큰소리는 쳤지만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우왕좌왕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대미.대북 문제는 일관성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일방적인 반미나 친미는 지혜로운 행동이 아닌 듯하다. 깊은 속내를 굳게 다지면서 작은 나라의 역할에 천착해야 할 것이고, 강대국 틈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을 보듬고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식구들을 데리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집권할 때 "집값만은 반드시 잡겠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그 반대가 됐는데.

"냉전 와해 이후 세계체제가 형성되면서 투기자본의 이동이라든가 개발 지역의 확산, 도시화와 노동 이동 등으로 집값과 땅값은 점점 오르고 있다. 나는 몇 년 전 충청도 시골에 인삼밭 모퉁이를 사서 집 짓고 살다가 팔고 일산으로 올라왔다. 겨우 2년 반쯤 지났는데 땅값이 열 배에서 스무 배까지 뛰었다더라. 실정이 이러니 누가 열심히 일하고 사업 하겠나. 젊은 사람들이 도심지에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건 까마득한 일이 되어버렸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도 부모 도움이 없다면 10년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그릇된 정책으로 이쪽 저쪽의 민심이 모두 떠난 것이다."

-'없는 사람'을 위한 분배는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나.

"지난 정권도 마찬가지였지만 '신자유주의'란 분배와는 거리가 먼 정책이다. 더구나 외환위기 여파가 아직도 남아서 신용불량자나 임시직 노동자가 수백만 명에 이른다. 특히 임시직 문제는 현 정권의 성격으로 보아 적극적으로 풀었어야 할 문제다. 그해 선거일 오후 대거 투표에 뛰어든 사람들이 바로 젊은 그들이었으니까. 그들은 변화를 기대했다."

-노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을 놓고 '네 편, 내 편 가르기'라는 말이 많다.

"소장 학자나 사회단체 사람들처럼 배신감 운운하지는 않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가 끝나자 3김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그들은 어쨌든 노련하고 카리스마를 가진 직업 정치가였고 수십 년 동안 수족처럼 보좌하던 가신들이 있었지만, 노무현씨는 그야말로 평지 돌출한 평범한 변호사였다. 서구식으로 주말여행에 동행할 수 있는 평범한 시민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그는 과거의 대통령에 비해 그렇게 욕을 먹을 정도로 큰 잘못도 없었다. 경륜은 부족할지 몰라도 순수하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자기가 '새로 시작하는 대통령인 줄 알았더니 역시 앞사람들의 설거지를 해야 할 마지막 대통령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을 때 신선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부문에 대한 설거지는 과욕이었다. 세상사란 언제나 조금씩만 개선되어 나아가게 마련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너무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언제나 목소리 큰 명분이 현실을 압도해 버린다. 지난 여름 '호치민 평전'을 다시 읽었다. 거기서 베트남의 저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았다. 그것은 아량과 현실에의 천착이었다."

-인사에 대해서는 언제나 '코드 인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는데.

"현 정권만 인사를 그 모양으로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원래 집권 목적의 중요한 하나가 자신들의 권력 범위를 형성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과거와 다르기를 원했다면 범위를 넓힐 필요는 있었겠다. 아니면 주위에 인사를 도울 만한 마당발 노장들이 전보다 많지 않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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