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영화] 업그레이드 대나무 액션 … 중국판 햄릿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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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제작 규모의 초특급 무협대작들이 할리우드에 맞서는 '아시아 블록버스터' 가능성을 보이면서 장이머우.천카이거 등 리얼리즘 감독들도 속속 가세했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2002) 때는 이를 국가 프로젝트로 받아들인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 대대적 홍보를 펼쳤다.

21일 개봉한 '야연'도 이 계보의 영화다. '와호장룡''영웅''연인'(2004)을 잇는 제작비 200억원의 대작이다. 이 영화들에 모조리 출연한 장쯔이가 또 한번 주연을 맡았다. 무술감독 위안허펑('와호장룡''킬 빌''매트릭스'), 음악감독 탄둔('와호장룡'), 미술감독 팀 입('와호장룡'), 촬영감독 장리('연인') 등 내로라하는 스태프들을 총동원했다. 감독은 펑샤오강. 국제적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중국에서는 '중국의 스필버그'라고 불리며 인기를 끄는 상업감독이다. 2005년 한 조사에서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에 뽑히기도 했다.

'야연'은 중국 블록버스터의 외연을 넓히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의 모티브는 서구의 고전 비극에서 따왔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담대한 '탈국적.퓨전 미학'을 선보였다. 중국 고대 황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공공연히 '햄릿'에 비견되며 '중국판 햄릿'으로 불리는 영화다. '영웅'이 진시황, '무극'이 중국 고대설화에서 모티브를 찾았던 것과 비교된다. 서구 고전 문학의 정수가 녹아 있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중국산 무협액션에 담아내려는 야심찬 시도다.

탁월한 영상미학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도입부 대나무 공연장이나 황궁 세트는 동양적 고요함과 서구의 풍요로움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독특한 '풍속극' 미학을 이룬 것처럼, 중국 고대무협의 양식미를 집대성하는 영화로 보일 정도다.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심지어 미래적 미감을 아우르는 '포스트모던.퓨전 미학'도 인상적이다. 눈썹을 반쪽만 그리고 입술도 절반만 화장한 황후 장쯔이는 SF영화 '스타워즈'의 미래 여왕(나탈리 포트만)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중국 고대 황실, 황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동생 리(유게)가 그 자리에 오른다. 새 황제는 형수인 황후 완(장쯔이)에게 청혼한다. 완은 원래 황태자 우루안(대니얼 우)의 연인이었지만 황제와 결혼해 새어머니가 됐던 여인. 황후는 아직도 황태자를 사랑하지만 새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아버지가 숙부에 의해 독살됐다고 믿는 황태자는 복수의 칼을 갈고, 황실 여인 칭(주신)은 그를 사랑한다.

영화는 네 인물 간의 팽팽한 갈등각을 통해 사랑과 배신, 욕망과 죄 같은 인간 원형적 주제를 탐구한다. 도입부 대나무 세트장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은 '와호장룡'과 '연인'으로 이어지는 '대나무 액션'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손색없다. 흰 가면을 쓴 무언극 장면도 격조 있는 긴장감을 전달한다.

단 한 치의 여백 없이 흘러넘치는 시각적 자극의 과잉 속에 정작 인물들 간 농밀한 정서적 긴장감이 잘 살아나지 않는 것이 흠이다. 드라마보다 오히려 호사스러운 시각 장치들에 시선이 먼저 꽂히고 눈멀어 버린 결과다.

황제 역의 유게는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1994)으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연기파다. 대니얼 우는 홍콩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란 배우. '뉴 폴리스 스토리' 등에 출연했고 중국 영화는 처음이다.

'야연'은 올 베니스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서 상영됐으며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노리고 있다. '야연'은 '밤의 연회'라는 뜻이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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