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함께 산 "나무할아버지"|수천만그루 「자식」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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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나무는 정직합니다. 돌보는 만큼 잘 자라고 결코 사람을 속이는 일이 없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곧잘 흥분하는 요즘 세태를 보면서 사람들이 나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5일 식목일을 맞아 육림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는 「나무 할아버지」 이훈씨(72·강릉시포남동)는 산과 나무가 곧 자신의 생활이고 삶의 의미이며 세파를 이겨내는 버팀목이라고 했다.
이씨는 30년이 넘도록 전재산을 털어넣으면서 산의 푸르름을 가꿔 한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이젠 「나무할아버지」「나무박사」로 별명이 바뀌었다.
『자손들이 푸른산을 볼수있고 맑은공기를 마실수 있다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그돈으로 부동산사고 증권투자하면 떼부자가 됐을 거라고 합니다마는 나무를 투자나 투기의 대상으로 생각해본적은 없습니다.』
반평생을 바친 보람으로 8백여정보(2백40여만평)의 야산에 빽빽히 들어선 수천만그루의 잣나무·참나무·강송(강원도소나무)·낙엽송을 바라보는 이씨의 눈길은 자식을 대하듯 다정하다.
이씨가 조림을 생각한것은 6·25가 한참이던 52년부터였다.
고향인 함흥에서 1·4후퇴때 가족과 함께 월남, 피난생활을 하면서 폭격과 남벌로 벌거숭이가된 산이 그렇게 흉해 보일수 없었다.
『비만 오면 흙탕물이 흘러내리고 더위를 피할 그늘하나 없고.』
이씨는 고향에서 국교교사 재직중 모아두었던 재산을 털어 목재소를 하면서 58년 춘천부근의 벌거숭이 야산 30여정보를 사들여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해마다 수만그루씩 묘목을 심었으나 토양과 기후가 맞지않아 시들시들 말라죽기 일쑤였다.
십수회의 실패를 거듭하며 이씨는 전국의 임업시험장·야산을 돌아보고 토양에 맞는 수종을 찾아내야 했다.
『68년 초겨울 폭설과 한파로 8년동안 온정성을 쏟았던 잣나무 10여만그루가 한꺼번에 넘어졌을때가 제일큰 고비였습니다.』
영림서 직원마저 포기하라고 권했지만 이씨는 목재소를 문닫고 인부 20여명과 함께 한달동안 밤잠을 설치며 쓰러진 잣나무를 지주에 묶어 세웠다. 이씨의 지극한 정성을 아는지 잣나무는 기적처럼 살아났고 오늘날 성공하는 밑거름이 됐다.
『아들 3형제가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고 모두 산으로 돌아와 사이좋게 내뜻을 잇고 있으니 이젠 더 바랄 게 없어요.』
장남 석원씨(38·관동대졸)는 73년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아버지를 돕고 있고 2남 석준씨(36·고려대경영대학원졸)는 83년 은행대리승진을 눈앞에두고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으며 3남 석재씨(34·한양대정외과졸)는 정치에 뜻을 두었다가 산이 좋아 결과적으로 아버지 뜻을 따르게 된것.
장남은 전반적인 관리를, 2남은 현장사업을, 3남은 대외판매를 각각 맡고있다.
『목재소를 하며 수입이 있는대로 버려져 있는 산을 헐값에 사들여 좋아하는 나무를 심은 것뿐인데 이젠 부자소리까지 듣게 됐으니….』
현재 이씨의 재산은 나무만 시가 30억원어치로 매년 5만∼6만그루를 벌채, 나무값 소득만 월1천여만원에 이르고 있다.
『1년에 한번 표창이니 뭐니 식목일 행사를 요란하게 하는 것보다 1년내내 관심을 갖고 나무를 심고 돌보고 하는게 훨씬 중요합니다.』
이씨는 그동안 산림청장상 두번, 내무부장관상 한번등 표창을 받았었다. <강릉=최형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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