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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의팩션기행] 5. '동양적인 것'의 슬픔 - 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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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메박물관

파리에서의 마지막 사흘은 동양적인 숨결을 찾아다녔다. 19세기 프랑스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만큼이나 식민지 건설에 열심이었다. 인도차이나반도를 지나 한 걸음 나아가면 중국이고, 그 다음이 바로 조선이다. 유럽의 열강들은 이 모두를 '동양'으로 묶어 탐냈다.

빅토르 콜랭이 졸업한 파리 동양어학교 옛 건물부터 답사했다. 오르세 미술관 뒷골목인 릴 거리 2번지! 고개를 들어 낡은 건물을 찬찬히 살폈다. 'INDO-CHINE(인도차이나)'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이 학교는 동양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식민지를 개척할 전문가 양성이라는 필요가 절묘하게 결합된 곳이다. 이국(異國)의 지혜와 미적 감각을 익힌 학생들은 동양이라는 보물을 아끼고 보호하며 결국 지배하려는 욕망을 키웠다.

또한 빅토르는 어려서부터 자연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지녔다. 1877년 '프랑스 도마뱀의 교미와 산란' '양서류에 기생하는 날개가 둘 달린 곤충에 대한 기록'과 같은 논문을 동물학회지에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서식하는 금개구리를 최초로 프랑스에 소개했다. '라나 플란시(Rana Plancyi)', 이것이 그의 이름을 딴 개구리의 공식 학명이다. 중국어문학에서부터 조선도자기, 법학과 생물학.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이 영민한 청년의 관심사는 넓고도 깊었다. 문.사.철에 자연과학까지 아우르던 19세기 조선의 실학자처럼 그 역시 배우고 익히는 데 선입견도, 두려움도 없었다.

동양 문물을 전문적으로 소장한 기메 박물관에서 또 다른 하루를 보냈다.

프랑뎅의 회고록에 따르면, 빅토르는 향수병에 시달리는 리심을 위해 "조선의 규방(閨房)을 복원(復元)해" 선물한다. 한국관에 전시된 빅토르의 기증품을 뜯어보며 리심이 머물렀던 규방을 상상했다. 태극 문양이 선명한 화각 이층 농을 쓸며 환하게 웃는 여인! 파리에서 누린 작은 행복이었다. 기메 박물관은 또한 1890년 12월 조선인 최초로 파리에 유학 온 홍종우가 근무한 곳이다. 서양인의 눈에도 거구로 비친 홍종우는 이곳에서 '춘향전'을 불어로 옮겼다. 그는 항상 고종의 어진과 대원군의 초상을 품은 채 센강을 거닐었으며, 왕명에 따라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할 만큼 철저한 왕당파였다. 파리를 체험한 두 사람의 운명은 귀국 후 극명하게 갈렸다. 대한제국 초창기 홍종우는 고종의 오른팔로 승승장구했고, 리심은 궁녀로 복직되었다가 자살했다. 같은 나라에 머물다 와도 다른 느낌을 갖는 것. 이것이 또한 삶의 신비로움이다. 나는 그들 곁에서 프랑스에 대한 엇갈린 체험과 화해하기 힘든 시선을 만들고 싶었다.

빅토르 콜랭이 1896년 서울로 들어올 때 사용한 외교관 여권(左).콜랭이 1877년 프랑스 동물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 삽입된 도마뱀 삽화(右)

파리동양어대학교

콜랭이 기메박물관에 기증한 화각농.

1층 전시실은 머리가 잘리거나 온몸이 토막 난 동남아시아의 불상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 불상들 앞에서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리심의 이야기는 지고지순한 로맨스로 풀리지도 않았고, 풀어서도 안 된다. 사랑에 매몰된 여인에게는 제국주의의 양면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정신을 아시아에 전한 나라도 프랑스이고 경제적 이익과 함께 이집트의 신상과 인도차이나의 불상을 토막 내 실어 간 나라도 프랑스다. 리심을 열렬히 사랑하는 멋진 모습만 담을 것이 아니라, 최초의 금속활자인 '직지심경'을 비롯해 조선의 중요한 서화와 도자기를 파리로 실어 간 콜랭의 잘잘못도 따져보아야 한다. 이 본질적인 애(愛)와 증(憎)의 변증법을 살피고 보편에 대한 갈망과 동양적인 것의 슬픔에 젖지 않는다면, 리심의 사랑도 여행도 헛것이리라.

마지막 날 오전 내내 짐을 쌌다. 프랑스와 모로코에서 구입한 서책과 지도 때문에 여행 가방이 잠기지 않았다. 파리 생활을 정리하며 리심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려운 소식이 연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리라. 일본인들이 궁궐에 침탈하여 중전마마를 무참히 살해했다는 망극한 이야기부터 열강들이 팔도의 각종 이권을 취한다는 안타까운 소문까지 조선은 회오리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나는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묻고 또 물었다. 무엇보다 소스라치게 두려운 존재는 파리지엔에 익숙해진 리심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귀국과 동시에 한양에서 단 하나뿐인 황색 얼굴의 파리지엔으로 살아야 한다. 파리에서 겪었던 외로움과는 다른, 어쩌면 더욱 섬뜩한 고독일지도 몰랐다.

1896년 4월, 개화여성 리심은 한양으로 돌아와 무슨 일을 했을까. 당시 조선은 아관파천 상황에서 대한의 제국을 세우려는 준비가 한창이었다. 고종은 빅토르를 불러 조선을 탈바꿈시키는 데 적극 협력할 것을 청했다. 나는 리심이 이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과 프랑스 공사관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추측한다. 조용히 공사관에만 머물렀다면 궁중 무희로 강제 복직 당할 이유도, 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까닭도 없다. 한데 왜 그녀의 삶은 비극으로 치달았을까. 팩션의 문은 이 물음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두툼한 답사일지와 2000여 장의 사진 정리를 마칠 즈음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황해의 섬들 사이로 여객선이 오갔다. 110년 전 새로운 숙제를 안고 제물포항으로 돌아온 리심처럼 나도 인천공항에 내렸다. 우리 둘의 진짜 삶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믿으며!

김탁환

◆ 조선 궁중 무희 리심은 누구 ?

리심(李心)은 대한제국 말기 프랑스 외교관과 사랑에 빠졌던 궁중 무희다. 초대.3대 프랑스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프랑시(1853~1922)가 그녀의 연인. 리심은 플랑시를 따라 조선 여성 최초로 프랑스에 발을 디뎠다. 플랑시가 모로코에 외교관으로 부임하면서 역시 최초로 아프리카 땅을 밟은 조선 여성이 됐다. 1896년 플랑시를 따라 귀국해 궁중 무희로 복직했으나 금조각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김탁환 교수는 9월 중순, 리심의 삶을 그린 3부작 소설 '리심-파리의 조선궁녀'를 출간할 예정이다. '김탁환의 팩션 기행'은 소설 2부에 해당하는 리심의 가상 여행기 집필을 위해 김 교수가 7월 7~28일 프랑스와 모로코를 취재.답사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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