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 거취 결정/자의냐 타의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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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압” 비난에 민자선 “본인 마음 흔들렸다”/TK원로들 잇단 공세로 청와대행 결심
전국적 관심이 쏠린 대구서갑구 보궐선거에서 첫번째 합동유세를 1시간 앞두고 정호용후보가 사퇴,사태가 급전했다.
TK동문의 대결,노태우대통령과의 대결등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던 정후보의 갑작스런 사퇴에 대해 정후보 지지자들은 물론 다른 무소속후보 진영에서까지 강압에 의한 사퇴라고 비난하고 나서 새로운 정치 쟁점화하고 있다.
정후보의 측근들은 그동안 정후보가 받아온 노골적인 압력이 너무 거셌다며 『사퇴는 무효』라고 반발하고 있다.
백승홍후보측에서도 『노대통령이 악랄한 방법으로 압력을 넣어 정선배를 유세장에 못나오게 하고 사퇴시켰다』며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공세를 폈다.
이러한 대민자당 공세에 김현근후보도 가세,야당측이 공격해오자 민자당의 박준병사무총장은 『본인이 처음부터 흔들리고 있었다』며 「자의」라고 반박,정씨 사퇴의 배경이 새로운 선거쟁점이 되고있다.
○…정부ㆍ여당은 그동안 집요하게 정후보의 사퇴공작을 해왔다.
정후보의 공직사퇴를 반대했던 서명파의원들을 통해 정의원의 사퇴를 종용하는 한편 이들을 선거 구동책으로까지 임명,정후보로 하여금 인간적인 비애를 느끼게 했다.
또 이상훈국방ㆍ김식 전농림수산장관 등 육사11기 동기생,안응모 내무부장관(전안기부차장)등 가까운 친구,친척,선ㆍ후배를 수시로 내려보내 사퇴종용을 해왔다.
특히 정보기관의 미행,형제와 후원자등 자금원에 대한 세무사찰압력,정씨 개인에 대한 뒷조사등이 계속돼 왔다는 것이 정후보측의 주장이다. 정씨의 개인재산에 대한 조사와 공개압력도 있었으며 당선돼봤자 소용없을 것이라는 으름장도 놨던 것으로 알려졌다.
후보등록 하루전인 지난 15일에는 노대통령이 직접 정후보를 불러 이현우경호실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전달,정후보도 마음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이날 노대통령에게 『뜻은 충분히 잘 알겠으나 나를 지금까지 도와주었던 사람들과도 협의를 해야하니 말미를 달라』고 사퇴가능성을 비쳤다.
그러나 정후보가 대구에 내려가 이러한 전말을 부인 김숙환씨에게 털어놓자 김씨가 『나는 그럴 수 없다』며 자살소동까지 벌이는 바람에 정후보는 다시 마음을 굳혀 『우리 부부 두사람만 남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며 후보등록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영삼최고위원도 17일 대구 모호텔사장 김모씨의 중개로 정후보와 직접 통화,『당신의 사퇴를 주장한 것도 나지만 2년 뒤에는 내가 당신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도록 앞장서겠다』고 설득했다.
박철언정무장관도 17일 대구로 내려와 경북고 41회 동기생들을 독려하고 월계수회의 전신인 대승기획의 기간조직으로 대서회를 발족시키는등 개입하기 시작했고,김옥숙여사도 지난 22일께 대구로 비밀리에 내려와 경북여고 동문표를 다졌는데 이때 김숙환씨와도 만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김숙환씨는 김옥숙여사의 면담제의를 거절하다가 결국 『20년 사귀어온 우리 사이가 금이 가서야 되겠느냐』는 설득에 서로 만나 노ㆍ정 양가문간에 그동안 쌓인 감정을 다소 씻고 사퇴결심을 유도하는 분위기를 마련했다는 얘기다.
특히 24일 오전에는 신현확 전총리와 정희택 전감사원장ㆍ김준성 전부총리ㆍ정수창 전상의회장 등 TK원로 동문들이 정후보를 만나 『이게 무슨 꼴이냐』고 다시 설득,정후보의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는것.
이에 이들은 『노대통령이 직접 나서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여권에 노­정 2차면담을 건의,24일 밤의 전격적인 면담이 성사됐다.
○…정부ㆍ여당이 정후보의 사퇴를 위해 끈질기게 정후보사퇴 공작을 펴온 것은 노대통령이 이번 보궐선거의 의미를 통치권과 3당통합의 명분에 걸었기 때문.
소속의원들을 40여명씩 대거 투입했음에도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대구지역에서 열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TK내의 분열현상만 드러나게 됐다.
지난 23일 안기부등을 통해 대구 서갑구 유권자에 대한 여론조사를 해 본 결과 정후보 45%,문후보 30%,백승홍후보 22%로 나타나 선거운동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문후보의 지지율은 조금씩 올라갔으나 지난주말 31%를 고비로 다시 하향곡선을 그린데다 앞으로 남은 열흘동안 두 후보간의 격차인 15%를 줄이기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노대통령의 직접 지원을 다시 건의했다.
특히 TK사단의 차기 집권구도등과 관련해,박철언정무장관외에도 문희갑씨와 같은 행정능력이 있는 젊은 인물이 필요하고 TK내에 감정적 균열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TK원로층의 거대한 힘이 집중적으로 작용,정씨는 당선돼도 TK사회의 분열만 일으켰다는 비난을 뒤집어 쓰게 돼 있어 사면초가의 입장에 빠졌다.
뿐만아니라 지난 20일 노대통령이 투표구책을 맡은 민자당의원 37명을 청와대로 불러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이후로는 정후보에 대한 자금줄은 완전히 봉쇄돼 정후보가 몹시 고통스러운 입장이었다.
또 무리를 해가며 정후보의 사퇴를 재촉한 것은 투표가 임박할 경우 정후보 지지표들이 감정적인 반발로 백승홍후보에게로 몰릴 수도 있다는 계산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후보의 사퇴로 가열되던 선거판은 김이 빠지고 선거양상은 전혀 딴 방향으로 가게 됐다.
그러나 한 후보에 대한 집권층의 사퇴압력이나 그 과정이 거의 공개되다시피 함으로써 정씨사퇴에 따른 후유증은 상당히 심각할 것이며 민자당은 선거전에 이기든 지든 정치도덕성에서 큰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됐다.<대구=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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