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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사용 시간 남 < 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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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공공시설의 화장실을 지을 때 남녀 화장실의 변기 수를 같게 하면 평등할까. 당뇨병 검진 프로그램의 대상자를 남녀 동일하게 산정해 예산을 배정한 경우는. 얼핏 보면 공정해 보이지만 정답은 둘 다 "아니다"이다. 여자 화장실의 변기 수는 남자 화장실보다 두 배 정도 많아야 한다. 여성의 화장실 평균 이용시간(3분)이 남성(1분24초)보다 길기 때문. 따라서 예산도 두 배가량 편성돼야 실질적으로 평등하다.

당뇨병 검진 프로그램은 정반대 케이스. 남성을 위한 검진 프로그램에 보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여성과 비슷한 검진 기회를 갖게 된다. 여성은 출산 전후 검진 시 당뇨 체크를 통해 남성보다 진단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 정부가 예산을 편성할 때는 이처럼 남녀에게 미치는 효과를 미리 고려해 예산을 짜야 한다. 또한 국회에 예산안을 낼 때도 예산이 남녀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분석한 보고서(성 인지 예산서)를 반드시 첨부해야 한다. 국회는 8일 '성 인지 예산제도' 도입을 포함한 국가재정법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 성 평등한 예산='성 인지 예산'은 사회복지.환경.교통.과학기술 등 정책의 전 분야에서 시행된다. 예컨대 2004년 14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대전시 노인 일자리 사업의 경우 전체 4500개의 일자리 중 남성 노인이 2100개, 여성 노인이 2400개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평균 수명이 긴 여성 노인의 비율(61.2%)을 감안하면 여성에게 일자리가 적게 배분됐다는 지적이다. 여성 노인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고 상대적으로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

이 밖에 노동부 직업훈련, 무료 암 검진 프로그램, 보건소 무료 검진 및 치료 프로그램, 농업종합지원금 등도 남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예산을 편성해야 할 대표적인 정책으로 꼽히고 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입법심의관 차인순 박사는 "성 인지 예산이 시행되면 성별이 평등하게 예산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된다"며 "화장실의 예처럼 보다 생활 밀착적이고 유용한 예산 집행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성별 통계가 뒷받침돼야=정부 각 부처는 결산 때도 남녀가 동등하게 예산의 혜택을 받았는지, 또 예산이 성 차별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쓰였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국회에 내야 한다. 한국여성개발원 김경희 박사는 "성 인지 예산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려면 남녀별로 분리된 성별 통계가 확보돼야 하며 담당 공무원이 제대로 시행할 수 있도록 사전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 성 인지 예산제도=호주에서 1980년대에 도입됐고 95년 베이징세계여성회의에서 행동강령으로 채택됐다. 현재 영국.스웨덴.프랑스.필리핀.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0여 개국에서 실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민노당 심상정 의원이 국회에서 지속적으로 이 제도의 도입을 주장했다. 지난해 말에는 여야 의원 100여 명이 성 인지 예산제 도입을 위해 서명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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