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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은 서민들의 한평생|「뿌리깊은나무」, 6년만에「길쌈아낙」등 5권 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뿌리깊은 나무」가 80년대초부터 추진해오고 있는 민중자서전 작업이 최근 다시 다섯권의 책으로 결실돼 서점가에 선보였다.
이 민중자서전은 지금까지의 일반자서전이 명사들에 의한 윤색된 자기과시의 기록이었던데 반해 살아오는 동안 이렇다하게 남의 눈길을 끌어본 적이 없는「이름없는 한국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이 솔직하게 육성으로 털어놓는 한평생 이야기를 정리해 엮은 것이다.
구비역사(Oral History)체계의 자술전기로 분류되는 민중자서전은 리처드 다클교수의 『일(Working)』이란 저서가 보여주듯 근래 서양에서는 각광받는 역사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 개념조차도 낯선 분야다.
우리나라에서 생경하기만한 민중자서전 출간 작업을 맨 처음 시도한 출판사는「뿌리깊은 나무」.
81년 제암리학살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전동례할머니의 한평생을 담은『두렁바위에 흐르는눈물』을 낸뒤로 84년까지『이제 이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조선목수 배희한),『어떻게 허먼 똑똑헌 제자 한놈두고 죽을꼬?』(임실설장구 신기남),『이「계동마님이 먹은 여든살』(반가며느리 이규숙),『장돌뱅이돈이 왜 구린지 알어?』
(마지막 보부상 유진룡)등 5권의 책을 잇따라 펴냈다.
6년이란 세월을 걸러 이번에 새로 선보인 5권은 안동포「길쌈아낙」김정호의 한평생을 담은『베도 숱한 베짜고, 밭도 숱한밭 매고』, 남도 전통 옹기장이 박나섭 『나죽으믄 이걸로 끄쳐버리지』, 진도강강술래 앞소리꾼 최소심의『시방은 안해, 강강술래럴 안해』, 영남반가며느리 성춘식의『이부자리 피이놓고 암만 바래도 안와』, 천리포어부 서영옥의『옛날엔 날 시공이라고 혔지 』 등이다.
출판사측이 이들 민중자서전의 대상주인공을 선정하는데 내세우는 요건은 특이하고도 까다롭다. ▲적어도 일흔을 넘긴 연만한 노인네일 것 ▲되도록 현대교육과 인연이 먼 문맹자로서 언어체계가 활자언론이나 방송의 영향을 덜받은 사람일 것 ▲가능하면 전통적인 상업이나 예능에 종사했던 사람일 것 ▲묻혀져 있는「이름없는」사람일 것등이 그것이다.
민중자서전이 한권의 책으로 꾸며져 나오는데는 대상선정문제를 비롯한 작업과정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따른다.
구술자들의 나이가 많기 때문에 기억력에 한계가 있어 옛날일을 재생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들이 자기 삶의 어떤 부분을 숨기거나 변색시키려 들기도 하고 심한 사투리·전문용어를 쓰기 때문에 기록자가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구술된 내용을 편집하는작업, 이를테면 순서와 연대를 바로잡고 어려운 전문용어, 사투리, 전달력이 약한 구술에 주를 다는일에도 짧게는 6개월, 길면 1년이상의 꾸준한 정성과 품이 들어가야한다.
이들 민중자서전은 우리의 진정한 민중사복원에 기여할 이른바 역사자료의 한 단면이 된다는 점 외에도 오손 되지않은 귀중한 언어·민속학적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책마다 본문분량의 3분의1이상을 방언·고어의 주석으로 채우고 주인공의 말과 말투를 분석해놓은 언어학자들의 논문, 그들의 생업과 세상살이를 관찰하고 쓴국내외 문화인류학자들의 글도 함께 실어 사라져가는 우리말, 우리삶의 원형이 어떤 모습이었나를 꼼꼼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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