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여는 개혁을 지향하는가/장두성(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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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ㆍ29이후 우리 정치가 걸어온 발자취를 보면 일이 꼬이도록 만드는 몇가지 구조적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민주화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기가 그처럼 높았음에도 개혁을 주도할 정치세력이 선거를 통해 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지지율은 과반수에 크게 못미치는 것이었다. 88년 4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소야대」란 뜻밖의 결과가 나왔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여소야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비록 3야당이 모은 지지표가 투표율의 과반수를 넘었지만 그것은 3김씨를 상징으로 삼은 지역성의 정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세 야당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뭉쳤더라면 대통령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를 옹립하지 못한데서 나온 결과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개혁주도의 힘이 거기서 솟아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하고 서로가 견제하고 경쟁하는 속에서 5공ㆍ광주청문회와 같은 정치극이 벌어지고 결국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 채 「5공청산」을 매듭짓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여소야는 다같이 점수를 잃었고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개혁이란 멀고도 험한 길을 앞에 놓고 신념과 국민의 지지를 갖춘 세력이 방향을 주도해도 잘 될까 말까 하는 판에 정치판도의 지리멸렬속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좌절감속에서 「보다 강력한 지도자」,보다 넓은 지지기반을 가진 정당의 출현을 갈망하는 여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여론의 흐름을 타고 나타난 것이 3당통합이다. 구조적으로만 본다면 「거대여당」의 출현은 그 과정의 무리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근거를 갖고 있다.
정국이 계속 표류하는 것을 막고 관료조직의 방향상실증과 경제ㆍ사회 전분야에 걸친 이완현상을 되돌릴 수 있는 길은 정치의 구심점이 확립되는 데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능을 발휘하는데는 몇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거대여당이 국민들의 눈에 정통성을 갖춰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여」가 지향하는 이념이 대다수 국민들이 바라는 개혁의 방향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져야 된다. 거여는 개혁을 지향하는가,현상고정을 지향하는가. 통합을 주도한 사람들은 이에 대한 확신을 국민들에게 주지 못했다.
합당에 대한 지지여론이 50%를 사이에 두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표류하는 정국을 바로 잡아 줄 정치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열망과 이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는 「거여」사이의 이같은 괴리현상이 두번째 구조적 요인이다.
세번째는 민주화,즉 권력의 분산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요구하는 상황의 모순을 들 수 있다.
그만큼 독재자의 권위주의아래서 고통을 받아왔으면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에 따르는 대가로서 어느 정도의 혼란과 사회기강의 이완현상은 참아 나가야 되는 게 원칙이다. 독재에서 민주화로 개혁을 이룬 나라치고 그런 과정을 겪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는가. 스페인이 그랬고,아르헨티나가 그랬고,심지어 고르바초프의 소련도 그런 과정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이런 과정을 참고 견디게 해 줄 개혁의 의지와 분명한 방향을 정치권이 제시해 주지 못함으로써 6ㆍ29선언이 있은지 거의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들이 참고 기다릴 인내심을 키워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같은 구조적 요인중에는 정치인들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이 할수 있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고 본다.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여대야소의 옴쭉달싹 못하는 구도를 타개하겠다고 나선 거여가 정치불신을 씻을 만한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이를 눈에 보이게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그 시발점은 6ㆍ29선언이 나오게 한 위기의식을 재확인하고 그 선언이 제시한 새로운 사회질서로의 실천의지를 보여주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자당은 합당절차의 무리를 극복하고 여대로서의 정통성을 획득해야 된다. 지난 2년반 동안의 개혁과도기가 확인해준 것은 개혁의 필연성이다.
그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쌓여져온 부조리의 척결이 최종목표지만 그 첫 단계는 정치인들 자신들의 신뢰감 회복이다. 그것은 특히 거여에 대한 기대이지만 이제는 야당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중요 쟁점법안을 놓고 여야가 합당이전이나 마찬가지로 답보상태를 보인 정치행태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2년후에 있을 총선에서 국민들로부터 거부당할 대상은 여야할 것 없이 제도권 정치인 모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가다가는 현 정치권은 과도기를 무위로 지나쳐 버린 책임을 지게되고 개혁이란 대업은 다음 세대 정치인들로 넘어가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1노3김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들은 어차피 다음 선거에서는 정치무대에서 물러날 가능성이 있지만 그들의 후계세력조차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그런 사태에 대한 경각심이 제도정치권으로 하여금 개혁을 협력해서 주도하도록 하는 유인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해본다.<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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