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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위의 마당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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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대중 정부 이후 잇따라 터져 나온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에 '마당발형 군상'들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을 빗댄 풍자와 해학이었다. "원색적인 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껴보자"는 것이 행사의 목적이었다.

최근의 상황도 예외가 아니다. 법조 브로커 윤상림.김홍수씨 비리사건, 기획부동산 업자 김현재씨 사건, 금융 브로커 박금성씨 사건, 대검 중수부가 수사 중인 김재록씨 사건 등에서도 마당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법조계의 마당발, 정치권의 마당발, 경제계의 마당발, 금융계의 마당발…. 나아가 학계.문화계.노동계.시민단체 등의 마당발도 튀어나오며 검찰의 수사 대상에 포함되고 있다.

법조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윤상림씨와 김홍수씨의 수첩을 한번 들여다보자. 일반 직장인들은 하루하루 일과를 근근이 채워 나가기도 어려운 큼지막한 노트에 'VIP-법조계-정치계-경제계-학계-기타' 등의 항목으로 나눠 깨알 같은 글씨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명단 앞에 입이 딱 벌어진다. 저녁을 두 번씩이나 먹은 경우가 허다하고, 거의 매일 같이 이어진 술자리의 흔적에 일종의 경이로움마저 생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한자리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들의 수첩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다른 마당발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검찰 설명이다.

오지랖이 넓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선 보면 자못 호기심이 생기는 대목이다. "도대체 얼마나 부지런하고 넉살이 좋으면 저렇게 발이 넓을 수 있을까" "내가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당발 인사들을 굳이 좋게 보려면 남다른 친화력을 바탕으로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당발이라는 게 과연 바지런히 열심히 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덕목일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학연과 지연으로 얽히고 설킨 우리 사회 연고주의의 폐단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서다. 각종 비리 혐의로 검찰에 불려나오면서도 넉살 좋게 이런저런 변명을 하고, 재판정에서는 온갖 변설을 다 늘어놓고, 교도소에서는 여전히 이 사람 저 사람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는 그런 마당발들을 수없이 봐왔다. 가치관이나 주관.이념에 근거한 대의나 명분보다는 불을 쫓는 부나방의 공허로움만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마당발이라는 수식어에선 활달함과 성실성 등에 근거한 '원만한 대인관계'라는 긍정적인 단어보다는 배신이나 음모, 이합집산, 검찰 수사, 구속 등의 부정적인 명사들이 연상된다.

'바다이야기' 등 사행성 성인오락게임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 와중에도 예의 마당발들이 또 등장하고 있다. 정.관계 인사들과의 폭 넓은 교분을 바탕으로 게임기 인.허가, 상품권 발행업체 지정 과정에 개입된 의혹을 받고 있는 브로커들이 수사 대상이다. 특히 일부는 김대중 정부에 이어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옮겨다니며 해결사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의혹이 있다고 한다.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담장 위에서 곡예를 하는 듯한 마당발들에게서 우리 사회의 비리 커넥션이 오버랩되고 있다.

박재현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