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부실 공화국'에서 산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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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일개 과자 따위로도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 있다. 군대에서 초코파이에 얽힌 사연 없는 한국 남자 없고, 새우깡은 예나 지금이나 첫사랑의 기억을 길어올리는 두레박이다. 첫사랑과 함께 떠났던 섬 여행 길, 갑판에서 갈매기를 유혹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시대를 불문하고 새우깡이었다.

소설가 하성란(39)에 따르면 웨하스도 당당히 그 대열에 낄 만하다. 하성란의 네 번째 단편집 '웨하스'(문학동네)를 읽은 소감을 말하라면, 단연 '웨하스의 재발견'이다. 하성란에 따르면 웨하스는 한국의 근대화를 상징한다.

표제작이랄 수 있는 '웨하스로 만든 집'을 보자. 한 여자가 외국에서 10년을 살다 들어온다. 한데 용케 찾아간 집은 무너지기 직전이고 골목은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다. 그녀가 살던 집은, 30여 년 전 시범주택 단지로 조성된 2층 양옥집이었다. 입식 부엌과 마루 천장의 샹들리에 덕분에 '대한뉴스'에 출연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시범주택은 처음부터 부실했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옮긴다.

'바싹 마른 마룻장이 바삭, 잘 구운 과자 소리를 냈다. … 바삭, 바삭, 바삭. … 둘째가 소리쳤다. "과자로 만든 집이야. 마루는 음, 웨하스로 만들었어. 이건 웨하스 씹을 때 나는 소리야."'

그러고 보니 베니어 합판 마루를 밟을 때 소리와 웨하스 베어먹는 소리는 닮았다. 한 번 물면 와르르 부서지는 웨하스랑, 멀쩡했던 2층 마루가 별안간 푹 꺼지는 것도 닮았다. 허물어진 뒤 폴폴 날리는 부스러기(또는 먼지)마저 비슷하다. 웨하스가 감히 한국의 근대화를 가리킬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소설엔 나오지 않지만, 웨하스란 이름도 한국 사회를 묘하게 반영한다. 본래 서양 과자지만 서양엔 웨하스가 없다. 대신 '웨이퍼(Wafer)'가 있다. 웨이퍼가 이 땅에 알려진 것도 서양의 음식점 체인이 상륙하면서부터다. 그래서 현재 한국엔 웨이퍼도 있고 웨하스도 있다. 이 가운데 '국산'은 물론 웨하스다.

예전보다 문장이 길어졌다. 현재형 시제를 고집하며 치밀하게 파고드는 특유의 묘사도 덜하다. 하나 유려한 흐름 같은 게 있다. 많이 둥글어진 느낌이다. 지금 보니 하성란도 등단 10년차가 됐다.

하성란의 출세작이랄 수 있는 '곰팡이꽃'(99년)에는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를 뒤지는 남자가 등장한다. 거기서 작가는 '생활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애매모호한 설문지보다는 쓰레기장을 뒤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맑은 눈과 예민한 손을 지닌 작가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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