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건강이상說 아무리 부인해도 믿지 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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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 주치의였던 허갑범(許甲範.66)박사가 병원을 열었다. 그는 최근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자신의 아호를 따 7층짜리 송원(松園)빌딩을 짓고 '허내과의원'이라고 이름붙였다. 지난 18일에는 친구.선후배 의사들을 불러 조촐한 개업식도 했다.

DJ가 대통령이 된 1998년부터 4년6개월 동안 주치의를 맡았던 許박사는 지난해 8월 연세대 의대를 정년퇴임했다. 요즘은 청와대 의무실장이었던 장석일(張錫日.46.성애병원장)박사가 DJ를 자주 진료하긴 하지만, 그도 한달에 한두번 가량은 동교동을 찾는다.

許박사가 DJ의 '어의(御醫)'로 낙점됐을 당시 국내 의료계에선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주치의는 가까운 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건강을 책임지기 때문에 의료계의 상징적인 자리. 이 자리를 서울대 의대 출신이 아닌 의사가 맡기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90년이었을 겁니다. 당시 평민당 총재로 지방자치제 관철을 위해 단식 할 때 金전대통령의 건강을 체크하던 張박사가 모시고 왔습니다. 金전대통령이 단식 2주일 만에 탈진해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거였죠. 그때 제가 돌봐드렸습니다. 그 인연으로 주치의가 됐죠."

지난해 초부터 DJ의 '건강 이상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자 許박사는 웃었다.

"DJ가 '췌장암에 걸렸다''대장암이라더라'는 등 별의별 소문이 나돌았다는 걸 압니다. 심지어 '총리대행체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그럴듯하게 포장돼 떠돌았습니다.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퇴임 후 8개월이 다 돼가는데 지금까지 치료받지 않고 숨길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정계.언론계 등에 있는 지인들이 물어왔을 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았어요. '우리 사회의 불신풍조가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참담했습니다. 당뇨.암 등의 질병이 사람의 몸을 갉아먹듯 불신풍조는 건강한 사회를 좀먹는다는 것을 느꼈죠."

그는 "金전대통령께서 지난해 초부터 과로로 인한 폐렴과 위장장애로 고생은 했지만 업무 수행에 지장받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뇨병 권위자인 許박사의 별명은 '하회탈 박사'.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살이 마치 하회탈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80세 가까운 고령인 金전대통령께서 재임기간 중 건강에 이상없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며 별명에 걸맞게 환하게 웃었다.

"곁에서 보니 대통령직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려운 자리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金전대통령은 강단과 의지가 대단했습니다. 게다가 건강체질이었죠. 재임기간 중 얼마나 큰 일들이 많았습니까. 저는 주치의 임명장을 받으면서 의사로서의 직분 이외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許박사는 의약분업 파동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주변에선 의약분업의 문제점에 대해 DJ에게 강하게 설명하라고 그를 졸라댔다. 하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주치의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문 분야인 당뇨 예방법을 물었다. "당뇨의 주범은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 속의 단백질이 파괴되죠. 그래서 저는 진료실 밖에 아무리 많은 환자가 진을 쳐도 환자들 때문에 중압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을 겁니다."

그는 환자 진료를 끝내고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이선희.64)와 신촌 주변을 산책할 때가 가장 즐겁다고 했다.

글=김동섭,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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