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칼럼

정치 '블랙홀'과 박범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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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저명한 소설가 박범신씨가 최근 입맛 쓴 경험을 했다. 지난달 28일 출범한 '희망한국 국민연대'에 발기인으로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희망한국…'은 고건 전 국무총리가 주도하는 조직이다. 시민단체를 표방했지만 사실상 고건씨의 대통령 선거운동 전초기지 역할을 하리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척하면 입맛이고 툭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다.

문제는 박씨가 장삼이사도 알고 있는 정치판의 '상식'을 잠시 잊은 데 있었다. 그는 "알고 지내는 의원이 '좋은 뜻으로 출범하는 시민단체'라며 발기인 참여를 권하기에 망설이다가 응했다. 고건씨가 대통령 되라고 지지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소박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김대중씨가 대통령 출마하려고 당을 만들 때도 발기인 참여를 권유받았지만 김대중 지지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절했을 만큼 정치와는 거리를 두어 온 문인이었다.

'희망한국…' 출범 소식과 함께 박범신씨의 이름과 사진이 신문에 나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가 작품활동을 접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고 예단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이 곳곳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정치 입문을 축하한다"부터 "당신이 그럴 줄 몰랐다"까지 온갖 전화가 빗발쳤다. "고건 캠프에 줄을 대달라"는 청탁 전화를 받고서는 쓴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결국 한 일간지(한겨레 9월 1일자)에 '내가 요즘 겪은 해프닝'이라는 글을 기고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박씨는 "이래서 '그(정치판) 근처에서는 놀지도 말라'고 어른들이 말했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말했다.

고건씨처럼 대선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정동영씨의 캠프에서 활동하는 중견 소설가 S씨의 생각은 박씨와 다르다. 3년 전 선배 문인의 권유로 정동영 편이 된 그는 "왜 소설 안 쓰고 정치판을 기웃거리느냐고 힐난받고, 웃기는 놈으로 취급당하기도 했다"며 "정치를 무조건 비난한다고 정치가 없어지기라도 하나. 정치인도 작가적 상상력을 수혈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문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을 탐낸다. 후광(後光) 효과가 짭짤하기 때문이다. 만사를 권력 관계로 해석하고 움직이는 정치인에게, 자신과는 사고방식부터 행동양태까지 모든 것이 대척점에 서 있는 예술가는 매력 있는 존재다. 대부분 권력에 무관심하니까 권력을 빼앗길 위험도 없다.

게다가 예술가는 창작물을 통해 정치인의 이미지를 실상보다 훌륭하게 대중에게 전달할 능력이 있다. 프랑스 화가 다비드가 그린 명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서 나폴레옹이 타고 있는 백마는 실제로는 당나귀였다. 말보다는 당나귀가 험준한 산을 잘 타기 때문이다. 당나귀에는 경마잡이까지 딸려 있었다. 자그마한 당나귀 위에서 허덕댔을 나폴레옹을 다비드는 멋지게 포장해 그렸고, 덕분에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다.

예술가도 예술가 이전에 한 시민이기에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정당 발기인은 물론 당대표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소설가 S씨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 정치판의 '블랙홀' 속성이다. 박범신씨도 여기에 당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단박에 빨아들이는 위력에 국민마저 익숙해져 '대선주자 고건=희망한국=박범신'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33년간 좋은 소설을 써온 유명 작가의 이미지마저 순식간에 증발시켜 '고건 캠프'에 가두어 버렸다. 나는 고건씨가 당나귀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백마처럼 훌륭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박씨를 발기인 명단에 포함시킨 것은 확실히 남는 장사였다.

그러고 보니 가을만 온 게 아니다. 정치의 계절도 왔다. '블랙홀 주의보'라도 내려야겠다. 가장 효과적인 대처법은 예술가의 본령을 잊지 않는 것이다. 정치와 예술은 길항(拮抗) 관계일 때 서로 건강해진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