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 아버지의 하동관 창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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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58년 경기고 3학년이었던 필자(앞줄 오른쪽에서 둘째)의 사진 개인전 때 찍은 가족사진. 원래 2남6녀였지만 형은 전사했고 누이 한 명이 빠져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은 서울 을지로 수하동에 있었다. 현재의 외환은행 본점 맞은편 골목길, SK텔레콤 사옥 뒤쯤이다. 마당이 깊고 예쁜 한옥이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청계천에서 인쇄소를 운영했다.

난 틈만 나면 인쇄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군것질거리를 해결해주던 노다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쇄소에서는 활자를 직접 만들었다. 크고 작은 활자를 만들고 나면 납덩이 찌꺼기가 남았다. 채 식지도 않아 따끈따끈한 납덩이를 들고 엿장수한테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는 전쟁 직전에 인쇄소 일을 접었다. 그리고는 생계를 걱정하다가 식당을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가족회의를 소집해 당신의 결심을 밝혔다. "인쇄소를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대식구를 먹여 살릴 방도를 찾다가 식당을 하기로 결정했다. 밥장사를 하면 너희들이 굶지는 않을 것 아니냐."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가족의 반대에 부딪쳤다. 먼저 큰누나가 반대하고 나섰다. 먹는 장사를 하더라도 밥장사가 뭐냐는 것이다. 누나는 제과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사춘기 여고생 생각에 밥장사는 너무 초라했고 제과점은 그나마 보기에는 예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도 나섰다. 친구 보기 창피하다고 했다. 식당하는 집에 친구를 어떻게 데려오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경기중학교(5년제)는 고관대작들의 자식들이 많이 다니던 학교였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밥은 항상 먹을 수 있는 것이지만 빵이나 과자를 먹고 살수는 없다. 그리고 하는 일이 떳떳한데 뭐가 창피하단 말이냐. 다만 식당 일은 너희들이 학교 가고 난 뒤에 시작해 돌아오기 전에 끝내겠다." 그러나 형은 끝내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해 개업하던 날 아버지의 문패를 떼버렸고, 그 일로 해서 죽지 않을 만큼 혼이 났다.

이렇게 해서 곰탕집 '하동관'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주방에 들어갔다. 뒷마당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밤새 참나무로 불을 땠다. 물을 부어 양을 늘리지도 않았고 쌀뜨물로 색을 내지도 않았다. 오직 정직하게 진국 곰탕을 끓여냈다. 손님에게 내놓기 전에는 꼭 시식을 해 합격, 불합격 판정을 했다.

깍두기도 하동관의 명물이었다. 아버지는 한입에 먹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깍두기를 만들기 위해 무를 여러 가지 크기로 잘라 직접 입에 넣어보는 실험을 거쳐 알맞은 크기를 결정했다.

이런 노력을 했으니 유명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좁은 골목길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우리 집의 방과 마루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점심시간에만 영업을 했는데도 하루에 300그릇을 팔았다. 종일 영업하면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약속대로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3시 이전에 일을 끝냈고, 우리가 귀가할 무렵에는 여염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 어려운 시절을 배고프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뜻한 바였다. 하동관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무슨 일이든지 성의를 다하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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