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소설〉이상문 『은밀한 배반』·이창동 『진짜 사나이』|이 시대의 상황 따른 「정치적 감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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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금 어떤 작가가 어떤 작품을 쓰고 있는가. 이런 물음에 민감한 것이 월평이 지닌 시각이 아닐 수 없는데 그것은 월평이라는 것이 지닌 정치적 감각 때문이다. 그 감각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작품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 감각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당대의 독자만이 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보아도 이 사정은 뚜렷해진다.
모델로 된 동지 살해사건의 기억도 새로운 발표 당시의 『악령』과 이 작품에 대한 레닌의 혐오스런 비판이 영향력을 지녔던 1920년 전후의 『악령』,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읽는 『악령』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으며 과장한다면 별개의 작품처럼 읽힐 수도 있는 것. 작품뿐이랴. 고리키의 『어머니』속에 나오는, 그 어머니를 겨냥한 총부리와 부다페스트의 소녀를 깔아뭉개는「프라하의 봄」을 여지없이 무산시킨 소련군 탱크의 캐터필러를 구별할 수 있는 것도 다름아닌 정치적 감각의 있고 없음에서 말미암는 것.
그렇다면 당대 독자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정치적 감각이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이상문씨의 증편 『은밀한 배반』(동서문학 2)에서 이점을 잠깐 엿볼 수 없을까. 70년대 초반 시골 미션계 중학교에 다니며 문제아였던 동창들이 서울에 쳐들어와 오늘날 예비군 중대장으로, 잡지사 기자로, 오퍼상으로 겨우겨우 소시민 계층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것은 좋다든가 겨우 그 정도냐고 자조함도, 우쭐댐도 아닌것. 작가는 다만 가치중립적 처지에 서있다.
말을 바꾸면 작가는 집단으로서의 자기 세대단위를 문제 삼았던것. 분단문제를 한 개인의 운명적 도박의 시각에 두고 지속적인 창작을 벌여온 이 작가가 90년대 들어와 자기 세대단위를 드러내고자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이 작품의 정치적 감각이 문제된다. 분단 과제란 이처럼 세대적 과제였던것.
이창동씨의 『진짜사나이』(문학동아 봄호)는 어떠할까. 『용천뱅이』이후(그러니까 주사파가 판을 치던 고비를 넘겨)처음 대할 수 있는 이 작품은 6월 항쟁때 만난 한 중년의 막노동꾼을 다루고 있다.
처음 만남은 시위구경 나왔다가 경찰에 잡혀갔을 때였고, 두 번째는 명동성당 농성장, 세 번째는 모열사 빈소, 네 번째· 다섯 번째등등이 단계적으로 이어진다. 만일 이 작품을 한 막노동자가 어떤 식으로 의식화 되어가는가를 그린 것으로 읽는다면 얻는 것이 의외로 적을 것이다.
만일 소설가인 작중화자「나」가 먹물(지식인)인 스스로를 비웃고 동시에 줏대 없는 노동자의 어리석음을 비웃기 위한 쪽으로 이 작품을 읽는다면 그 역시 얻는 것이 많지 않을 것. 그렇다면 어떤 독법이 제일 많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작가의 정치적 감각을 엿보는 수준에서의 독법이 아니겠는가.
노점상 철거현장에서 리어카에 스스로 묶은 쇠사슬에 끌려가는 사나이를 두고 작가는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민중의 굳건한 힘이랄까, 승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작가의 정치적 감각이 깃들여 있지 않을까.
작가는 지금 「성스러운 그 무엇이 사라진 90년대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그 끌려가는 사나이는 실상 상실돼 가는「성스러운 것」의 상징이었던 것. 어떤 개인이든 세대단위든 집단이든 그를 그이게끔 하는 「성스러운 것」을 알게 모르게 갖추고 있는 것. 이것이 없으면 아무도 자신 있는 행동에 나아갈 수 없는 법. 작가에게 그것은 글쓰기인 것. 이 점에서 진짜 사나이 장병만은 『용천뱅이』가 아닐 수 없다.
6월 항쟁이후 세상이 크게 달라졌고, 또 동구권이 무너지고 북한조차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근거란 무엇인가. 성스러운 것·또는 본질적인 것의 믿음에 있는 것. 어느 시대에는 그 의상이랄까, 표정이 분단문제였고 남로당이었고 노사문제였던 것. 90년대는 의상이 달라졌던 것. 이 의상이랄까, 표정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감각을 두고 정치적인 것이라 불렀다. 김윤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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