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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IReport] 순환출자 금지 땐 투자 어려워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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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두산이 1999년 증자를 할 때 계열사인 두산산업개발(옛 두산건설)을 끌어들였다. 신주와 자사주 등을 1200여억원을 받고 산업개발에 넘겼다. 이어 2001년 발전설비 독점업체인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을 2500여억원에 인수했다. ㈜두산은 다시 두산중공업으로부터 130여억원을 받고 산업개발 주식을 팔았다. 두산그룹이 '두산산업개발→㈜두산→두산중공업→두산산업개발'의 순환출자 고리를 갖게 된 과정은 이러했다.

요즘 순환출자가 이슈로 등장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를 금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다. 정부는 그간 강력한 재벌 규제 수단으로 사용해 왔던, 그러나 말 많고 탈도 많았던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하는 대신 순환출자 금지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 이중대표소송 금지나 일본식의 업종 수 제한 등도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지만 공정위의 내심은 순환출자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자 재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차라리 출총제 규제가 더 낫다고까지 말한다. 왜 그럴까.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곳이 많아서다. 공정위에 따르면 자산 2조원 이상 59개 대규모 기업집단 중 순환출자로 그룹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15개. 출총제를 적용받는 자산 6조원 이상 그룹 11개, 자산 2조원 이상으로 상호출자금지만 받는 4개 그룹 등이다. 삼성.현대자동차.SK.롯데 등 국내의 초대형 그룹들은 대부분 포함돼 있다.

게다가 순환출자는 그룹 내 핵심 기업들을 대상으로 형성돼 있다. 삼성은 '삼성생명→전자→카드→에버랜드→생명', 현대자동차는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 SK는 'SK㈜→SK텔레콤→SKC&C→SK㈜' 등의 출자구조를 갖고 있다. 하나같이 그룹의 주력기업인데다 자회사를 많이 거느린 모기업들이다. 이 중 한 회사라도 뺏긴다면 그룹 전체의 소유권이 위태롭게 되는 구조다.

순환출자는 재벌 규제의 산물이기도 했다. 공정위는 주식 소유와 관련, 재벌그룹들에 두 가지를 규제하고 있다. 순자산의 25% 이상을 다른 기업에 출자하지 못한다는 출총제, 그리고 자회사는 모기업에 출자하지 못한다는 상호출자 금지 등이 그것이다. 이 규제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대기업을 인수하거나 그룹 경영권을 상속하려면 순환출자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령 두산이 순환출자구조로 바뀐 것은 두산중공업 인수 때문이었다. 그룹에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두산중공업을 인수할 곳은 당시 ㈜두산밖에 없었다. 출총제를 피하려면 증자를 통해 자기자본을 늘려야 하는데 그룹 내 기업으로는 ㈜두산이 사실상 유일했다. 문제는 이 회사가 그룹의 모기업이란 점이다. 증자 과정에서 잘못되면 그룹 전체가 위험해진다. 그래서 계열사인 두산산업개발이 끼어들었다. ㈜두산이 증자할 때 참여해 신주를 사고 자사주도 매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상호출자금지가 문제가 됐다. 그룹의 핵심 기업인 ㈜두산이 두산산업개발의 주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두산중공업이 이 주식을 인수했다. 이처럼 두산은 순환출자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출총제와 상호출자금지에 걸리지 않으면서 중공업을 인수하고 그룹 경영권도 유지하는 '일석 다조' 효과를 봤다.

순환출자 금지는 출총제보다 훨씬 세련된 규제이기도 하다. 목적은 둘 다 같다. 오너가 자기 돈이 아닌, 계열사 돈으로 출자해 그룹을 더욱 키우거나 경영권을 상속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그룹의 문어발식 확장과 오너의 경영권 전횡.세습을 규제한다는 목적이다. 이를 위해 출자량을 묶은 게 출총제다. 그룹의 핵심 기업이든, 별 볼일 없는 계열사든 동일하게 '순자산의 25%'라는 덫을 놓았다. 자연히 투자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다. 덫에 걸린 기업들은 신규 사업에 출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환출자 금지는 '마음껏 출자해라, 단 순환출자만 하지 마라'다. 현대차는 기아차에 마음껏 출자해라, 기아차도 현대모비스에 실컷 출자해라, 그러나 모비스는 현대차에 출자하지 마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룹 입장에선 순환출자가 훨씬 부담된다. 출총제는 그룹의 핵심 기업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부분 자본금이 많은 대규모 기업이다. 자기자본이 많을수록 다른 기업에 출자할 여력이 많아지기 때문에 핵심 기업들은 출자 규제를 덜 받는다. 출총제에 걸릴 것 같으면 증자를 통해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순환출자가 금지되면 증자가 여의치 않다. 그룹 안에서 증자에 참여할 만한 계열사가 많지 않아서다. 덩치가 비슷한 다른 계열사들이 있다고 해도, 이들은 이미 주식으로 서로 얽혀 있는 상태다. 보유 중인 핵심 기업의 주식을 매각하는 것은 더 어렵다.

가령 현대차가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보유 중인 기아차 주식을 몽땅 판다고 했을 때 대략 2조1000여억원이 필요하다(주식 수 1억3000여만 주, 주가 1만6000원 가정). 이를 사갈 기업을 그룹 안에서 찾기는 어렵다. 오너 가족이 그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외부에 팔아야 하는데, 이 경우 외국계 기업이나 투기자본이 이를 산다면 그룹 경영권이 위험해진다. 인수한 기아차를 통해 모비스, 현대차 순으로 지배할 수 있어서다. 순환출자로 얽힌 다른 그룹들도 마찬가지다. 오너 입장에서는 경영권 안정이 최우선이다. 투자는 그 다음 문제다. 경영권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투자 확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란 얘기다.

또 순환출자나 출총제는 다 같이 소유를 규제함으로써 재벌의 병폐를 고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연구원 김현종 연구위원은 "순환출자 금지와 지배구조 개선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순환출자로 형성돼 있는 외국 그룹 중 지배구조가 우수한 곳이 많다"고 지적한다. 지금은 그룹의 문어발식 확장이 우려되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그룹을 키우려는 오너의 기업가 정신이 실종된 게 더 문제라는 비판도 있다. 순환출자를 허용해도 투자가 늘지 의심스러운 판에 공정위는 '투자 옥죄기'만 생각한다는 지적이다.

김영욱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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