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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철학아, 다시 놀 ~ 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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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있었다. 신입사원 면접장에 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의 셔츠에 얼룩이 묻어 있다. 나는 그 청년에게 얼룩이 묻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까, 아니면 말아야 할까.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일이다. 고상한 철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생각을 뒤집어 보면 얼룩이란 사소한 사건이 진지한 사색의 촉매가 될 수 있다.

철학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임마누엘 칸트의 동기주의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벌써 골치가 지끈거릴 수 있겠다. 그런데 셔츠의 얼룩과 칸트의 동기주의는 동전의 앞뒤처럼 잘 맞아떨어진다. 칸트의 동기주의를 믿는다면 청년에게 셔츠의 얼룩을 일러줘야 한다. 청년이 옷에 신경 쓰느라 면접시험을 망친다 해도 상관없다. 칸트는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를 도덕적이라고 믿었다. 동기와 결과는 별개인 셈이다.

또 다른 경우를 가정해본다. 가족, 혹은 연인이 불치병에 걸렸다. 본인은 병명을 알지 못한다. 그런 환자에게 병의 실체를 알려줘야 할까. 병명을 알게 된 환자가 오히려 더 깊은 절망에 빠져 남은 삶조차 포기하는 건 아닐까. 칸트의 동기주의에 따르면 병을 알려야 한다. 반대로 결과주의를 믿는다면 거짓말을 해도 무관하다. '거짓된 사실'이 '냉혹한 진실'보다 때론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제법 거창해졌다. 철학은 일상과 동떨어진 '괴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뜻에서다. 위의 두 사례는 철학저술가.자유기고가로 활동해온 독일인 볼프람 아일렌베르거의 '철학의 시작'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 삶과 동떨어진 분야로 치부되곤 하는 철학을 삶의 한복판에 끌어들인 책이다. 철학은 더 이상 쓸모없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이 책에는 모두 23가지의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니체.하이데거 등 서양 철학자만을 다뤄 아쉬운 구석도 있지만 '철학=생활'이란 키워드를 알기 쉽게 풀어 철학 입문서로 제격이다. 최근 논술바람을 타고 뜻밖의 인기를 끌고 있는 철학이 만만한 친구처럼 다가온다.

저자는 철학을 일종의 놀이로 간주한다. 철학은 놀이가 아닌 엄숙한 그 무엇이라고 믿어온 독자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놀이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놀이의 본질 같은 건 애초에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여러 놀이 사이의 유사성만 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문맥과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철학을 놀이로 보고, 나아가 놀이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의심해보는 저자의 시각이 파격적이고 흥미롭다. 소설 읽듯 책을 넘기다 보면 철학적 전문개념이 머리에 쏙쏙 박힌다. 철학은 결국 생각하며 사는 삶과 동의어인 것이다.

'철학, 삶을 만나다'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린 책이다. 저자 강신주 박사는 장자(莊子)를 전공한 소장 철학자. 그 역시 철학과 삶 사이에 끊어진 '유대의 끈'을 복원시키려고 한다.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을 종횡으로 넘나든 독서 경험을 눈여겨볼 만하다. 나름대로 소화된 언어로 자신이 터득한 철학 세계를 자상하게 풀어놓는 자세가 돋보인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이성을 통한 철학적 행위를 하고 있다. 그는 이성이란 어떤 주장에 대한 근거나 이유를 찾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어떤 낯선 상황과 마주칠 때 이성이 활동을 시작한다고 했다. 사실 우리는 개인 간, 혹은 집단 간에 부딪히는 수많은 주장에 정당한 이유와 근거를 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머리를 쓰고 있는가. 낯선 상황을 친숙하게 바꾸고 나면 다시 또 다른 낯섦이 다가온다. 우리의 인생은 그런 끝없는 만남과 사유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이라는 두 개의 흐름으로 철학사를 대별했다. 그리고 장자와 니체, 들뢰즈와 같은 우발성의 철학자에게 많은 점수를 준다. 현재 나의 존재는 어떤 필연적 이유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들의 연속으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이 만남이란 사건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삶은 수많은 사건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축복이다"는 식의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특정 주장을 정당화시켜 나가는 사색과 논리의 깊이를 추적하며 독자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것이 철학책 읽기의 즐거움일 것이다. 철학, 별것 아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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