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칠기, 그 섬세함과 화려함의 극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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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한때 자개장은 부의 상징이었다. 부잣집 마나님이 등장하는 TV 드라마 안방에는 어김없이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파트 붙박이장이 일상화한 지금이지만 아직도 자개장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한국문화에서 자개(나전)의 전통은 깊다. 그중 극성기는 고려시대로 꼽힌다. 나무에 옻칠을 하고 자개를 박은 나전칠기는 상감청자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화려한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다.

한국인의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나전칠기 명품이 한자리에 모인다. 5일부터 10월 8일까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나전칠기-천년을 이어온 빛'이다. 규모.수준 모두 역대 최고의 나전칠기 전시로 평가된다. 고려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명품이 한데 소개되는 것도 처음이다.

?국내외 걸작 총집합=고려 나전칠기는 세계적으로 20여 점밖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만큼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이번 전시에선 모두 7점이 나온다. 그중 6점은 일본에 있는 것이다. 그간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일본 소재 나전칠기(조선시대 포함 21점)를 총망라한 셈이다. 전시장에 나온 나전칠기는 60여 점. 삼국시대 칠기(漆器) 등 관련 유물을 합하면 총 97점이 된다.

고려 나전칠기는 독특함은 대모복채법(玳瑁伏彩法)이라는 제조기법에 있다. 바다거북 등딱지(대모)를 얇게 갈아 투명하게 하고, 그 안쪽에 붉고 노란 색을 칠해(복채) 해당 색채가 바깥으로 비쳐보이도록 하는 했다. 중국 당나라에서도 복채기법을 썼으나 주로 수정.호박 등 보석류에 적용했다. 일본의 한 개인이 갖고 있는 '나전 대모 국화넝쿨무늬 모자합'은 붉은 색, 노란 색 계통의 대모가 영롱한 자개의 색과 어울리며 화사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 오묘한 색채의 향연=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나전 대모 넝쿨무늬 염주합'은 고려시대 공예품의 걸출한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모와 나전이 빚어내는 색채가 화려한 것은 물론 문양.형태도 극도로 정교하다. 염주합 뚜껑 윗면을 구슬무늬 띠와 꼰 금속선을 경계로 모두 네 구획으로 나눴으며, 그 복판에 만물의 생성.소멸을 뜻하는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 문자를 자개로 새겨넣었다. 색과 모양이 각기 다른 국화넝쿨무늬도 세 종류나 된다.

일본의 개인이 소장한 '나전 국화넝쿨무늬 경전함'도 섬세함의 극치다. 잘게 자른 자개 여러 개를 모아 하나의 꽃무늬를 만들고, 그것을 경전함 표면에 촘촘하게 어어 붙였다. 넝쿨 줄기나 무늬 사이의 경계선과 테두리에는 가는 금속선을 심어넣었다. 고려 나전의 국화꽃 무늬는 고려 상감청자에도 즐겨 사용됐던 것이다.

◆ 섬세한 손놀림 일품=나전칠기에는 엄청난 수작업이 들어간다. 칠기의 바탕이 되는 나무를 다듬는 것부터 시작해 여러 차례 칠을 입히고, 자개를 붙이고, 마지막 손질까지 통상 20단계의 공정이 필요하다. 일례로 고려 나전칠기는 국화.모란 같은 꽃무늬를 규칙적으로 배치하며 장식성을 높였는데, 그 꽃 하나하나의 크기가 사방 1㎝를 넘지 않았다. 또 작은 꽃무늬를 나무 바탕의 칠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 채우려면 매우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국화.모란.연꽃 등의 꽃무늬가 다양해지고 크기도 커졌다. 꽃 모양 자체도 실제에 가깝게 표현됐으며, 칠기 바탕의 여백 또한 넓어졌다. 전체 분위기가 대담하고, 여유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나전 연화넝쿨무늬 옷상자'가 그런 변모를 잘 보여준다. 역사의 중심추가 고려의 찬란한 불교문화에서 조선의 담백한 유교문화로 옮겨간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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