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확 줄이고 빌 게이츠 '눈에 띄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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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 새 중.고교 역사(중국사.세계사) 교과서가 나왔다. 기존 교과서에서 크게 취급했던 중국 사회주의혁명과 민족주의 영웅은 작게 다루는 대신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 빌 게이츠와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와 대형 투자은행인 JP모건을 상세히 소개한 것이다.

기존 교과서는 사회주의 시각에서 농민 봉기에 의한 왕조 교체,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 침탈과 이에 대한 항전, 공산혁명과 사회주의 중국 건국 등을 비중 있게 다뤘다.

하지만 새 교과서는 문화사와 경제.과학.기술발전사에 초점을 맞췄다. 중국사에선 사회주의혁명 부분을 대폭 줄였으며 세계사 부문에서는 서구의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을 많이 취급했다. 역사를 보는 시각을 확 바꿔버린 것이다. 민족과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던 상석을 경제와 사회.문화에 넘겨준 획기적인 변화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교과서 개정은 상하이시에서만 이뤄졌고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비롯한 다른 대도시에선 아직 조짐이 없다.

◆ 마오쩌둥도 밀렸다=이달부터 사용되는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확 바꾼 주인공은 상하이시다. 시 교육 당국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내놓은 새 교과서는 특히 사회주의 건국 영웅이자 현대 중국 정치를 주름잡았던 마오쩌둥(毛澤東)에 관한 기술부터 대폭 줄였다. 한 단락에서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한 인물'로만 간단하게 언급했다.

1950년대 이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마르크시즘도 거의 퇴출당했다. 중국 사회주의를 '영광스러운 미래를 가져올 주역'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52개 단원 중 하나로 축소했다.

과거 역사교과서를 관통했던 민족주의도 많이 줄었다. 예를 들면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항한 한족의 영웅 문천상(文天祥)에 관한 기술이 새 교과서에선 아예 빠졌다. 중국 통일을 이룬 진시황에 관한 기술도 확 줄였다.

◆ 과거보다는 미래에 비중=개정작업에 참가한 관계자는 "과거 역사 기술은 이데올로기와 민족 정체성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번에는 그 대목을 줄인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민족 정체성과 혁명사 중심으로 차세대를 교육할 수는 없다"며 "세계화 속도가 빨라진 요즘의 국제정세를 감안해 학생들로 하여금 미래를 준비하도록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교수는 "몇몇 영웅이 아닌 경제와 기술 등 생활의 변화가 역사 책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의 전체적 구조를 강조한 아날학파 페르낭 브로델의 관점을 많이 수용했다"며 "문화와 종교, 경제와 사회 관습 부분에 관한 기술을 대폭 늘렸다"고 소개했다.

◆ 정치적 배경설도=개정작업이 현 지도부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면서 지속적인 개방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상하이방(上海幇)의 본산인 상하이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특히 눈길을 끈다.

다음달 공산당 당 대회를 앞두고 최근 들어 현 지도부와 상하이방의 갈등설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현 지도부에 대한 상하이방의 공세가 역사교과서를 통해 표현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현 4세대 지도자 후진타오(胡錦濤)는 최근 공산혁명 회고 행사를 잇따라 열고, 분배를 강조하는 조화사회론 등 이념성을 강조하며 실용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던 상하이방과의 차별화를 추진하고 있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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