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정현종 시인 4년 만의 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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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한복판이다. 하늘은 높고 단풍은 눈부시다. 중견 시인 정현종(64.사진)씨는 이맘 때 어떤 느낌이 들까. 그는 일단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나는 술잔을 앞에 놓고/한국어의 한 자존심 그 보물 중에서/내 십팔번 '푸르른 날'을 불러 본다./(중략)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노래의 자연')

그렇다. 미당 서정주의 '푸르른 날'만큼 청명한 하늘을 읊은 시도 드물다. 하지만 시인은 이내 슬픔에 젖는다. "9월도 시월도/견딜 수 없네/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중략)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아프고 아픈 것들이여."('견딜 수 없네')

가을의 찬란함과 서글픔을 두루 겪은 시인은 마침내 하루하루를 감사한다. 저녁 식사 한끼도 거창한 일('때와 반복의 거창한 그림자들')이요, 하루를 지낸다는 것 자체가 제일 좋은 일('어떤 문답')이다.

정현종씨가 4년 만에 신작 시집 '견딜 수 없네'를 냈다. 사물과 인간의 본성을 명료한 언어로 노래해온 그의 개성은 여전하다. 별다른 기교나 과장없이 나와 너의 만남, 자연과 생명의 어울림을 꿰뚫어온 '시력(詩歷)'도 흔들림이 없다. 이순(耳順)을 훌쩍 뛰어 넘은 그에게 자연은 이제 명함과도 같다.

"얼굴들 지워지고/모습들 저녁 하늘에 수묵 번지고/이것들 저것 속에 솔기 없이 녹아/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름 때야말로 항상/나의 명함이리!"('나의 명함')

시인에게 사랑은 타인과의 소통이다.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당신을 통과하면/모든 게 살아나고/춤추고/환하고/웃는다."('빛-꽃망울') 1978년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섬')던 시인은 이제 그 섬을 넘어 타인을 관통하는 '득도'의 경지까지 올라갔다.

때문에 그는 희망도 '자발적인 가난'에서 찾는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의도적 투항과 유사하다. "현대적, 도시적, 추상적인 것들의 저/깊은 병(病)에서 한껏 해방되어/태양과 계절의 걸음걸이에 합류하는/그 자발적인 가난."('집을 찾아서') 그는 자연스럽게 풀잎에 기댄다. "나는 손과 펜과 몸 전부로/항상 거기 귀의한다./거기서 나는 왔고/거기서 살았으며/그리로 갈 것이니……"('풀잎은')

나이 탓일까, 시인은 조바심도 감추지 못한다. 속도전의 도시와 물질욕의 문명을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전보다 커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면서 '세상의 아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서울살이를 '권태가 폭발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 돈과 권력과 기계에 자신을 다 먹혀버린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식당이 가득한 계곡, 레스토랑이 즐비한 물가는 굶어죽은 귀신이 환생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이번에 이례적으로 '정치적'인 시도 썼다. 이라크전의 비극에서 파괴된 언어(시)를 걱정하고, 권력은 있을 때 행사하는 걸 삼가야 한다며 위정자를 경계한다.

그의 '간단한 부탁'은 이렇게 끝난다. "꽃집의 유리창을 깨지 말아다오." 또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고 말한다. 부박한 현실을 타이르는 시인이 이내 손에 잡힐 것 같다. 그런데 시는 현실에서 얼마나 힘이 셀까. 시인은 오늘밤에도 그 한계에 마음이 아플 수 있겠다. 그래서 "대통령이든 신이든(중략)/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경청')이라고 호소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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