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장관-판 깨는 노동계 '합작품'

중앙일보

입력

노사관계 로드맵 최종 협상을 목전에 두고 부산에서 개최된 국제노동기구(ILO) 아·태지역 총회에서 결국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한국노총이 30일 돌연 로드맵과 관련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의 발언을 문제삼아 총회 철수를 선언했다. 40여개국 노동장관 등 손님을 잔뜩 불러놓고 주인들끼리 '쌈박질'을 하다가 잔칫상을 엎은 것으로 국제적 망신을 사게 됐다.

총회 기간 만큼은 잠복돼 있을 것으로 보였던 '로드맵 갈등'이 불씨가 됐다. 빌미는 노동행정을 총괄하는 이상수 장관이 제공했다.

이 장관은 이날 오전 노동부 출입기자들과 가진 조찬간담회에서 로드맵 관련 질문을 받고서 "노사정 협상이 안되더라도 9월7일 입법예고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또한 "직권중재는 폐지하되 대체근로가 가능한 필수공익사업장을 확대하는 안을 노동계가 수정 제의했다"는 내용의 협상 과정도 일부 공개했다.

다음달 2일 최종협상을 앞두고 협상 과정 중에 나온 세부안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즉각 총회장 안팎에서 이 장관이 너무 경솔했던 것 아니냐는 반응이 흘러다녔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접한 한국노총이 갑자기 발끈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점심식사 시간에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서 "정부가 도발적으로 로드맵 협상을 파괴하려는 상황에서 ILO 총회는 더이상 의미가 없어 철수한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 위원장은 "노사협상 과정 중의 내용을 총회가 열리는 기간에 공개해 협상의 금도를 깬 파트너와는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노총은 ILO 총회 철수와 더불어 다음달 2일 노사정대표자회의도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노동계의 다른 축인 민주노총은 총회는 계속 참석하겠으나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 여부는 31일 회의에서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이로써 ILO 부산 아태총회는 노사정 중 한국노총이 빠진채 '반쪽'으로 파행진행될 수 밖에 없게 됐으며, 정부와 노동계가 공동으로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총회에 참석한 한 인사는 "아마추어 장관과 판을 깨는데 익숙한 노동계가 만들어낸 최악의 합작품"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다른쪽에서는 전날 노무현 대통령이 총회 환영연설을 통해 노동계의 양보를 주문한 것과 연결시켜 이 장관이 의도적으로 노동계를 자극했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서 노동부는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우발적인 것"이라고 부인했다.

노동계 안팎에서는 더 큰 문제로 향후 로드맵 협상까지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들고 있다. 이 상태라면 다음달 2일 열리는 10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무산되면서 노정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을 것으로 우려된다.

이 경우 정부의 로드맵 독자 입법예고와 노동계의 총파업 등 격한 투쟁으로 이어지면서 다시금 노-정, 노-사 관계가 '빙하기'로 접어들게 분명해 보인다.

정부측 관계자는 "어찌됐든 외국 대표들 앞에서 한국의 후진적인 사회적 대화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 같아 부끄럽다"고 말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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