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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은 잃었지만 비전은 잃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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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빌리 데이비스(右)가 도우미 제이슨 맥폴(左)의 안내를 받으면서 뛰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끈으로 묶은 채 사이클과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몸은 망신창이가 됐지만 완주해서 너무 기쁩니다. 포기할 수 없었어요.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내가 보여줘야 하니까요."

27일 밤 10시34분, 제주도 서귀포시 월드컵경기장 앞에 설치된 제주아이언맨대회 피니시라인. 대다수 참가자들은 이미 완주했거나 포기했고, 진행자들도 대회 마무리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흑인 참가자 한 명이 백인 도우미와 함께 지친 모습이었지만 한없이 밝은 표정으로 느릿느릿 결승선을 거의 마지막으로 통과했다. 그리곤 눈시울을 붉히며 기다리고 있던 부인과 힘껏 포옹했다.

주인공은 시각장애인으로 풀코스 철인3종 경기에 처음 도전한 미국인 빌리 데이비스(46). 그의 기록은 14시간 34분 17초. 이날 제주 앞바다 파도가 높아 수영(3.8㎞)종목은 취소됐고 사이클(180.2㎞)과 마라톤(42.195㎞) 경기만 열렸다. 일반인 완주자들의 평균기록이 12시간 대였으니 한참 늦은 기록이다. 사이클 경기 도중 체인이 부러져 2시간 15분 동안 사이클을 밀면서 걸었고 이 과정에서 발바닥에 온통 물집이 잡혀 마라톤도 7시간 넘게 걸어서 완주해야 했다.

일반인도 엄두를 내기 어려운 철인 3종 경기에 시각장애인인 그가 나선 이유가 무엇일까. 데이비스는 유전적으로 시력이 아주 나빴지만 운동에는 재질이 있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0종 경기에 미국 대표선수로 발탁됐다. 그러나 미국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운동을 그만 뒀다. 그리고는 기업체 전산담당자로 평범한 삶을 살아갔다.

그 뒤 시력이 점점 나빠져 96년에는 완전한 실명에 이르렀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세상과 담쌓고 지냈다. 그러기를 2년여, 어느날 친구의 권유로 사이클을 함께 타게 됐다. 잊고 있었던 자신의 운동능력을 확인한 그는 이후 끊임없이 여러가지 종목에 도전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샌디에고까지 600마일을 사이클로 두 번이나 달렸으며, 수영.마라톤.골프.스키에 도전했다. 연습과 장애인 경기 때마다 자신의 '눈'이 되어준 아들 조너선(18)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이번 대회에는 마운트 샌 안토니오대 교수인 제이슨 맥폴(31)이 특별 도우미로 나섰다.

"시력은 잃었지만 비전을 잃은 적은 없습니다. 전 세계 장애인 모두가 스스로 일어서는 날까지 뛰고 또 뛸 겁니다"

이번 대회 주최 측인 SC제일은행의 모회사인 스탠다드 차타드은행이 2003년부터 시각장애인 100만명의 수술비 마련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 한국까지 찾게 됐다고도 했다. 주최 측은 이번 대회를 통해 기금 6만달러를 모았다. 이 같은 취지에 공감한 세계 32개국에서 1200여명이 참가했고, 장애인도 10여 명이 동참했다. 현재 그는 보험설계사인 부인 로리의 일을 도와주면서 장애운동협회(CAF)의 기금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SC제일은행 크리스 드 브런 부행장은 "데이비스는 이번 대회에서 우리 모두가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줬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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