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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자발적 가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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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억새꽃들이 애타게 손짓을 해도 돌아보지 않았지요. 기러기 떼들이 다시 돌아와 머리 위를 선회하며 끼룩끼룩 아는 체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하루종일 핸드폰을 꺼놓고 음성사서함에 "저는 산중에 들어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메시지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사기를 쳤지요.

핸드폰은 편하지만 시시로 조급하고, 외롭고, 불안하고, 화나게 합니다. 예전엔 홀로 있고 싶으면 산문을 닫거나 입산하면 그만이었는데, 산중에서도 핸드폰이 터지니 더 이상 호젓할 수가 없지요. 차라리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이 더 행복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대에게 편지를 보낸 뒤 답장을 기다리던 며칠간은 또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던지요.

핸드폰을 끄고, 보길도의 강제윤 시인이 보내온 신간 '숨어사는 즐거움'을 읽었습니다. 동병상련일까요. 그의 편지글 '자발적 가난'에 대해 생각하며 두 끼를 굶었습니다. 숨어살기 위해 섬에 왔지만 결국 세상 속에, 사람들 속에 숨어살았다는 그는 염소의 맑은 눈빛을 닮았지요. 세연정과 동천다려의 동백꽃이 피기 전에 보길도를 다녀와야겠습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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