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⑩·끝 소설- 편혜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편혜영은 지난해 소설집 '아오이가든' 딱 한 권을 낸 신예다. 거기에선 이러지 않았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살아 있는 지옥을 종류별로 구경하는 사파리 여행을 온 듯했다. 엄마에게 버려진 채 집안에 갇힌 어린 아이가 쥐의 배를 녹슨 칼로 가르자 쥐새끼들이 튀어나오고('저수지'), 역병이 퍼진 도시에서 임신한 누이가 피묻은 가랑이 사이로 개구리를 낳는('아오이가든') 식의 악몽 같은 장면이 이어졌다.

그런데 '퍼레이드'에는 그런 끔찍함이 없다. 기껏해야 동물원 퍼레이드 단원으로 일하는 K가 단장에게 '똥구멍처럼 인상이나 쓰고 있는 주제에 만날 지각이냐?'고 욕을 먹는 정도에 그친다. 그저 등장인물들의 일상이 퍼레이드용 코끼리처럼 비루하고 지루할 뿐이다.

퍼레이드의 주인공인 코끼리들이 동물원에서 탈출하자 퍼레이드도 폐지된다. 하루아침에 등장인물들은 유령의 집 귀신, 동물원 청소, 롤러코스터 검표원 등이 된다. 이들에겐 다른 일을 하면서도 퍼레이드를 하던 버릇이 남는다. 아이들에게 '안녕 안녕! 하고 손을 흔들며 같은 말로 두 번씩 인사'하고, 심지어 '무릎을 살짝 구부리기까지' 한다.

'그럴 때면 자신이 검표원의 탈을 쓰고 퍼레이드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S에게 세상은 언제나 퍼레이드 중이었다.'

하긴, 세상은 모든 인간이 땀에 전 인형 탈을 쓰고 '안녕 안녕' 인사하는 거대한 퍼레이드일지도 모른다. 작가도 "사회적 자아로 지내다 보면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사는 느낌을 갖게 되지 않나요. 저도 그런 느낌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더 절망적인 건, 그곳에서 도망쳐봐야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 손을 탄 코끼리는 공원보다 더 인공적인 구조물인 지하벙커로 숨어든다. 탈출한 코끼리 마냥 공원에서 뛰쳐나간 K와 E, P, S가 향한 곳도 기껏해야 지하철역이다.

어쩌면 탈출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는 한여름에 더운 인형 탈을 쓰는 게 불만이었다. 그러나 새 퍼레이드에서는 탈을 쓰지 않는 왕자 복장을 하게 되리라는 언질을 받고 '곧 추워질 텐데 계속 인형 옷을 입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기 때부터 작은 말뚝에 묶여 지낸 코끼리가 힘센 어른이 된 뒤에도 거기에 묶여 지내듯이, 끔찍한 현실이라도 익숙하다면 변화가 두려워지는 법이니까.

소설은 지난해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 코끼리 탈주 사건과, 여의도 한복판에서 발견된 비밀 지하벙커 소식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실 '아오이가든'도 사스에 감염돼 마스크를 쓴 홍콩 사람들의 모습 등 뉴스에서 소재를 빌린 것이다. '퍼레이드'는 다만 그만큼 자극적이지 않을 뿐이다.

신수정 예심위원은 "젊은 작가가 온갖 실험을 해본 소설이 '아오이가든'이라면, '퍼레이드'에서는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말하는 소설적 기법이 더 성숙해졌다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작가는 "첫 소설집을 낸 뒤 이미지 과잉 때문에 주제의식이 가려진다는 지적을 받았다"며 "이제 자제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럼 앞으로 그녀의 소설에서는 더 이상 시체를 만날 수 없는 걸까.

"다음엔 도시의 평범한 현실에서 만나는 섬뜩함, 낯선 걸 만날 때 느끼는 공포를 쓰고 싶어요."

시체는 나오기도 하고, 안 나오기도 할 거란다.

이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