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추억] 카레이스키 애환 승화시킨 '한민족 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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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카레이스키(러시아 내 고려인)의 한 서린 유민사를 그림으로 승화시킨 화가 신순남씨가 지난 18일 별세했다. 78세.

24일 주 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은 타슈켄트 내 예술인 마을에 거주하던 신씨가 노환으로 타계했다고 발표했다.

고인은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의 희생양이 된 고려인을 그리며 소련의 만행을 고발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할머니 손을 잡고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내쫓기며 현장에서 본 참혹함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림이다. 97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수난과 영광의 유민사-신순남'전에 선보인 대표작 '레퀴엠-이별의 촛불, 붉은 무덤'은 내몰린 고려인의 삶과 죽음을 묘사한 대형 연작이다. 화가는 '레퀴엠'에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노예였다. 노예에겐 이름도, 민족도 없다. 그래서 얼굴을 그려 넣지 않았다"고 그 이유를 말했다.

고국에서의 첫 개인전 뒤 그는 '레퀴엠' 등 64점을 모국에 기증했다. "민족의 아픔을 그린 그림을 어찌 팔겠는가"라고 소중히 간직해온 걸작이다. 작품을 기증받은 국립현대미술관은 2004년 특별전 '잊혀진 질곡의 유민사-신순남의 진혼곡'을 열어 그 뜻을 기렸다. 정부는 그에게 해외거주 동포 화가로는 처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2001년 신순남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하늘색 고향'을 발표한 영화감독 김소영씨는 "신 화백이 한민족 작가라는 사실이 가슴 벅찼다"며 "한민족의 애환을 그린 작가지만 나아가 파시즘에 희생된 모든 이의 아픔을 그린 화가"라고 말했다. 1928년 연해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뒤 우즈베키스탄 벤코프 미술학교와 아스트로브스키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우즈베크 공훈미술가인 고인의 작품은 러시아 대표 화가의 작품과 나란히 여러 미술관에 걸려 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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