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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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먹물처럼 밤은/여전히 번지고/달력 한 장/목매달아 죽는 밤/주먹을 두들겨도/묵묵한 그림자/모두가 회한에/사무치는 지난 날이/벌거숭이 가슴에/젖어드는 강줄기/원망도 눈물도/끝없는 세월에/무심한 추억으로/쓸쓸히 지우는/마지막 술 한잔.) (이용식의 시 『섣달 그믐날밤』)
굳이 시심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해를 마지막 보내는 이시간이 되면 누구나 회한에 사무치게 된다. 그리고 원망도 눈물도 모두 망각의 강물에 띄워보내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러나 달력속에서 영원히 지워질 1989년을 마지막 송별하는 이 순간은 여느 해와 다른 색다른 감회에 젖게 된다. 그야말로 회한과 눈물로 점철된 그 쓰라린 80년대를 마감한다는 뜻만도 아니다. 더구나 희망에 부푼 90년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이 한햇동안 정말 많은 것을 보고 겪고 느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잃었으며 또 많은 것을 얻기도 했다.
우선 가까이서는 문익환목사와 임수경양의 밀입북파동으로 북방화해무드에 젖어있던 사회전반에 큰 충격파를 던진 사건도 있었다. 동의대에서는 같은 젊은이들 끼리의 충돌로 경찰관 7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슴아픈 사건도 있었다. 「참교육」시비가 몰고온 전교조사태나 계속되는 노사분규로 수출이 둔화되고 경제위기까지 맞는 심각한 국면도 우리는 이해에 모두 보고 겪었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숨가쁜 고비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는 「대안협」이라는 말을 되찾게되었고 그 지긋지긋한 「5공청산」을 실현하게 되었다. 어찌 감회에 젖지않을 수 있겠는가.
또 멀리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고 24년간 철권을 휘두른 독재자가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장벽은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채 그대로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다. 더구나 귀가 어두운 북의 독재자는 아직도 세계에서 일고있는 저 우렁찬 민주화의 외침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가 1989년의 마지막 캘린더를 보며 색다른 감회에 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말자.
희망도 버리지 말자.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또 다시 새벽이 오면 우리도 목청껏 「자유의 송가」를 부르는 날이 기필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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