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여당도 외면한 정부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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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기획예산처가 '비전 2030-함께 가 는 한국' 브리핑을 당초 21일에서 28일로 연기한다고 통보해 온 것은 20일 오후 7시가 넘어서였다. 예산처는 이미 일주일 전부터 사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장관이 직접 브리핑하겠다고 예고했었다. 1년 동안 공을 들여 준비한 야심작이라고도 했다. 그러다 일요일 저녁 갑자기 발표 일정을 바꾼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정이 '바뀐' 것이다.

일정에 제동을 건 곳은 열린우리당이었다.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당정 협의를 한 결과 증세가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노 대통령이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비전 2030'이 뭐기에 여당이 반발하는 걸까. 제목만 보면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도 먹고살 수 있는 성장동력 발굴이나 경쟁력 강화 계획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정 협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내용은 그와 다르다고 한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 온 분배정책의 새로운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여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함께 가는 한국'이란 부제도 그래서 붙은 듯하다.

무엇보다 당정 협의 참석자들의 귀를 의심케 한 것은 상상을 초월한 재정 규모였다고 한다. 중장기 복지대책엔 억 단위가 아니라 조 단위 숫자가 제시돼 있다. 당장 올해부터 2010년까지 4조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어 2011~2020년 300조원, 2021~2030년 1300조원이 들어가는 것으로 돼 있다는 것이다. 여당의 한 참석자는 "정부 계획은 2020~2030년 한국을 선진국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과연 현실을 고려했는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지적대로 정부의 계획은 이상론에 치우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조차 경제성장률이 2020~2030년이면 2.9%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여건으로는 1300조원짜리 복지정책은 고사하고 중국에 추월당할 것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열린우리당 강봉균 정책위의장은 21일 "먼 미래의 일인데 현 정부에서 책임지고 추진하겠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임기 말 무지갯빛 청사진을 남발하지 말고 어떻게 재원 조달을 할지, 무엇으로 성장 동력을 삼을지 현실적으로 따져보라는 주문이다. 여당이 이상론을 제시하더라도 정부는 차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법인데도 요즘엔 이 역할이 뒤바뀐 듯하다.

김동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