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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지' 시골에 책 1만5000권 채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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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전북 지역 대학생들이 남포문고의 책을 정리하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희망제작소 제공]

오윤택씨

전북 김제시청에서 15분쯤이면 닿는 작은 마을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에는 장서 1만5000권을 자랑하는 마을문고가 있다. 오윤택(46.사진)씨가 1984년 동네 학생회와 청년회를 조직한 뒤 새마을회관 안에 만들기 시작한 문고다.

"가난과 시력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선천성 각막염을 앓아 왼쪽 눈은 실명했고, 오른쪽은 마이너스 0.02 정도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14살부터 노동판에 뛰어들어 동네 버섯공장, 염전 등에서 5년 동안 일했지요. 그 뒤 서울로 올라가 쌀 배달 등 막노동 일을 주로 했습니다.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게 늘 아쉬웠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은 주민 등에게서 기증을 받았고 책꽂이는 학교에서 버리는 책상들을 고쳐 사용했다. 남포문고에 책이 쌓이고 운영이 조금씩 안정되자, 오씨는 대학생들과 현직 교사들을 설득해 방학 동안 초등생과 중.고생들에게 과외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그는 수험생을 둔 부모처럼 학생들이 밤샘 공부를 하는 동안 함께했다. 추운 날 학생들 뒤치다꺼리에 불면증 증세를 얻기도 했고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남포문고를 마을 제1의 도서관으로 이끈 오씨는 고속버스터미널과 경찰서에 제2, 제3의 문고를 만들기도 했다.

오씨는 남포문고 안의 책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2003년부터 이동도서관을 시작했다. 동네 사람이 빌려준 트럭에 책장을 짠 뒤 책 1500권을 싣고 다니면서 주민들에게 책을 빌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 동안 김제시의 14개 아파트 단지를 순회하는데, 회원이 1500명으로 불어났다. 책을 빌려 간 사람이 자신의 책을 기증해 주기도 했다. 여름과 겨울철에는 더위와 추위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돈이 문제다. 오씨는 84년부터 명절을 이용해 출향인과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불우이웃돕기와 문고기금 조성을 위한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다. 들녘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널려 있는 폐비닐.농약병을 주워 팔거나, 논을 임대해 보리농사를 지어 얻은 이익금 등을 기금으로 보탰다. 운영위원회를 만들고 위원들의 기부를 받아 기금을 1000만원으로 늘리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오씨는 문고기금 외에 마을장학회도 만들었다. 우산장학회라는 이름으로 현재 초등학생 두세 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오씨는 2000년부터 새마을회관의 방 하나를 얻어 정보화교실을 열었다. 장비는 김제우체국에서 기증한 중고 컴퓨터 11대로 충당했다. 정보화교육은 초등부.청년부.주부반.장년반.노년반 등 5개 반으로 나뉘어 엑셀.인터넷 등을 두 달씩 교육했다. 65세 된 할머니가 컴맹인데 여기서 컴퓨터를 배워 지금은 서류도 작성하고 인쇄까지 한다고 한다. 인근 지역에 이런 곳이 없다 보니 동네 사람뿐 아니라 김제시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런 성과로 2004년 행정자치부로부터 제4차 정보화마을로 지정됐으며 지난해 12월에는 정보화센터 새 건물이 들어섰다. 문화 혜택이 적은 시골 마을이지만 남포리를 지키는 든든한 문고가 있어 시골 어린이들의 미래를 밝힌다.

(www.makehop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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