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주자들의 가을 준비 ④ 손학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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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6월 30일 퇴임한 이후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책을 여러 권 쓴 정치학 교수(서강대) 출신에 누구 못지않게 '가방끈'도 길지만(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그는 공부와 담을 쌓고 여름을 보냈다. 콘텐트 축적에 몰두하는 다른 대선 후보들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대신 50일간 몸을 혹사시켰다. 내년에 환갑을 맞는 손 전 지사가 도지사 퇴임식 직후 기차를 타고 전남으로 '100일 민심대장정'을 떠날 때만 해도 '민생 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따라간 젊은 참모들이 허리에 무리가 생길 만큼 고되게 일했다. 호남에 있던 7월, 태풍이 경남을 강타하자 진주로 달려갔고 먹구름이 충청도에 비를 퍼붓자 다시 충남으로 향했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스케줄이다.

그의 모습은 197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을 하다 수배를 받아 2년간 도피생활을 하던 때와 닮았다. 철공소에 숨어들어 마스크를 쓴 채 용접일을 하고, 얼굴이 숯검정이 돼 탄광 잡일을 돕던 모습이다. 그 시절 그는 나라를 뒤엎을 생각에만 골몰했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나라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국민이 편할까"를 생각한다.

16일 경남 거제의 삼성중공업으로 찾아갔을 때 손 전 지사가 조선소에서 두 시간가량 용접일을 마치고 근로자들과 함께 샤워를 한 직후였다. 그를 안내한 이영춘 인사그룹장은 "VIP(귀빈)가 많이 찾아오지만 위험한 작업을 손수 한 경우는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손 전 지사가 둘러멘 배낭 속이 궁금해 양해를 구하고 뒤져봤다.

땀에 젖은 팬티.양말, 잠옷 바지, 세면도구.구급약.수건.지갑.안경.노트. 소지품의 전부였다.

그는 민생 현장을 다니는 것을 "기본으로 돌아가는 작업"이라고 했다. 학자로서 수립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국가 경영관을 보건복지부 장관과 도지사로서 적용해 봤으니 이제 다시 한번 국민의 생각을 직접 듣겠다는 취지다. 물론 손 전 지사 캠프 관계자들의 고민은 현실적이다. 경쟁 후보에 비해 처지는 인지도와 지지율이 답답하다. 그런 측면에서 18일로 반환점을 돌게 된 '민심대장정'은 일단 성공적이다.

여객터미널이나 버스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수염이 덥수룩한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손학규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깜짝 놀라며 "민생 탐방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다"고들 한다는 것이다. 손 전 지사는 "시민들을 놀래 주는 재미가 짭짤하다"고 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관심도 높다. 이날 손 전 지사는 홈페이지에 "우리 집에 와서 얘기 좀 들어달라"고 글을 올린 대우조선 근로자의 집에서 묵었다.

이날 밤 손 전 지사의 수첩엔 '파출부를 안 하면 노후생활 안 돼. (자식이) 타지로 대학을 가게 돼 교육비 벅차다'는 집주인의 하소연이 적혔다. 이런 식으로 기록해 온 내용이 100쪽짜리 수첩 네 권이다.

당내 기반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에게 국회의원이 줄지어 찾아오는 것은 '부수입'이다. 권오을.김광원.남경필.정병국 의원 등 20명 가까운 의원들이 그가 일하는 현장에 찾아와 일손을 보탰다. 이달 말께는 의원 10여 명이 1박2일로 동참할 계획도 있다. 그가 전국을 훑는 사이 캠프는 나름대로 부산하다. 최근엔 서울 서대문에 자그마한 연락사무실을 마련했다. 캠프의 핵심 역할은 경기도 부지사를 지낸 김성식 정무특보가 맡고 있다.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의 투옥 경력을 가진 김 특보는 대선 정책을 마련할 전문가를 모으고 올 가을 민심대장정이 끝난 이후의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김 특보는 "현재까지 30여 명의 전문가와 연결됐다"고 밝혔다.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 장관도 외연 확대 작업을 돕는다.

캠프 측은 손 전 지사가 당내 경쟁 후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시점을 '지지율 10%'로 보고 있다. 지난해 말 1%를 밑돌던 지지율이 4~5%까지 올랐고 연말까진 두 자릿수에 진입한다는 계획이다. 눈덩이를 굴리면 처음엔 조금씩 커지다 갈수록 무게가 기하급수적으로 는다는 '눈덩어리 전략'이다.

정작 손 전 지사는 "지지율 같은 데 마음을 두지 않는다"며 "민생 현장에 와 보니 정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요즘엔 백성을 위해 측우기와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생각을 참 많이 한다"고 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일어선 그는 "전시작전통제권을 꺼내 평지풍파를 일으킬 게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하는데…"라며 현 정부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거제=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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