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혜성같이 등장한 이만기|천하통일 열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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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민속씨름의 영웅들>
1천5백년이라는 기나긴 역사와 함께 우리의 몸 속에 깊이 스며있는 멋과 흥이 마치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잔치판-그것이 곧 씨름판이다.
한민족 고유의 얼과 순수한 정감이 저잣거리·강변 백사장 할 것 없이 민중이 숨 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한데 어우러져 물이 마당으로서 그 맥을 면면이 이어왔다.
따라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눈에는 첫번째 제거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고 강요된 침체를 거듭하던 씨름은 해방과 6·25의 격변을 거쳐 50년대 후반부터 부활, 재개되기는 했으나 서양 스포츠의 위세에 눌려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마침내 81년말께 씨름을 프로화 등의 방법으로 본격 부흥시켜 보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 2년 후인 83년 허완구씨(허완구·당시 대왕육운 사장)를 초대 회장으로 하는 한국 민속 씨름협회가 재구성되면서부터였다.
당시로서는 단일 대회 상금 최고액인 4천5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내건 제1회 체급장사 겸 천하강사 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에서 약관의 나이로 체구가 작은 이만기(이만기·당시 경남대 2년)가 혜성같이 등장, 기존 황소씨름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들어 메치고 왕좌에 오름으로써 씨름판이 일거에 관심과 인기의 표적이 되었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김성률(김성률)이후 무려 9년 동안이나 씨름계를 양분해 왔던 이준희 (이준희·1백14kg) 홍현욱(홍현욱·1백15kg)이 당연한 우승후보였던 것.
그때까지 전국 규모 대회에서 단 한번도 우승해본 적이 없는 신예 이만기가 예상을 뒤엎고 천하장사로 태어나는 순간 민속씨름의 장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평가는 한갓 기우로서 순식간에 모래판에 파묻혀 버린 것이다.
88서울 올림픽을 의식, 외국인에게 내놓을 수 있는 볼거리로서 전통 스포츠 개발의 필요성이 거론되던 터에 민속 씨름의 출범은 빅 히트를 한 셈이다.
어쨌든 모래판에서 오묘한 힘과 기(기)의 파노라마가 뿜어내는 재미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전통」을 상쾌한 기지개와 함께 깨어나게 했다.
6년이 지난 지금까지 흐트러짐 없이 건재를 과시하는 이만기는 그동안 천하장사 10회 우승이라는 위업과 함께 민속씨름 63개 타이틀(천하17·체급46) 중 34개(천하10·백두17·한라7)를 휩쓸며 3백19전 2백72승47패(승률0·853)를 기록했고 통산상금 3억1천3백45만원을 벌어 고액납세자가 됐다.
2m5cm·1백20kg의 인간 기중기 이봉걸(이봉걸·32·럭키금성)이 같은 기간 1백83승 77패(승률0·704)로 1억4천6백50만원을 번 2인자임을 감안하면 승률 및 상금면에서 월등한 단독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3인자는 손상주(손상주·27·일양약품)로 초기 금강급 7회우승 후 체급을 올린 한라급에서 최다 우승기록(9회)을 세워 2백82전 2백1승81패(승률 0· 710)로 상금은 1억3천50만원.
그밖에 이만기가 속한 현대 씨름단 동료로 동갑내기이자 라이벌인 고경철(고경철)이 2백6승90패(승률0·696)로 1억2천6백만원을 쥐어 상금랭킹 1억원대를 넘어선 마지막 네 번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가하면 89년 들어 이만기를 연속 제압, 모래판 최대의 돌풍을 일으킨 철부지 장사 강호동(강호동·18·일양약품)을 비롯하여 이만기의 연습상대였다 17대 천하강사가 된 김칠규 (김칠규·23·현대), 부상으로 정상권에서 멀어졌다가 불같은 투혼으로 제3회 동경 천하장사에 오른 불곰 황대웅(황대웅·22·삼익가구) 등이 무서운 기세로 솟아올라 민속씨름 제2기의 주연을 다투고 있다. <김인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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