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의식개혁이 절실하다(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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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젠 어느 자리에서나 정치가 입에 오를 때마다 사람들은 상을 찌푸리거나 심한 경우에는 욕설마저 서슴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상을 찌푸리고 누구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것인가. 입에 올려봤자 기대할 것 없는 정치이야기, 한가닥 희망을 품어봤자 실망만을 안겨주는 정치인들에 대한 체념과 염증의 반작용이다.
6·29선언에서 오늘에 이르는 지난 2년여 동안 우리는 정치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희망을 안고있었던가.
압제와 권위의 시대가 물러가고 민주화의 새 질서·새 체제에 따른 새 바람의 정치가 열릴 것이고, 새 풍토·새 면모를 갖춘 정치인들이 민주화의 새 시대를 여는 첨병 역할을 맡을 것임을 성원하고 기대해 마지않았었다.
그러나 지난 2년, 아니 짧게는 1년 동안 과연 우리의 정치풍토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고 새로운 얼굴을 갖춘 정치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던가. 아니면 그러한 기미, 그러한 조짐의 흔적이라도 찾아볼 수 있었던가.
구절양장의 멀고도 험한 길을 거쳐 이제 한해를 다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정신의 상징물인 청산과 개혁은 마치 걸레조각처럼 찢기고 퇴색해 버린 채 대통령의 결단이라는 마지막 단안으로 넘겨져 버렸다.
실낱같은 여운만을 남기고 최악의 코스를 좇아 최악의 막바지를 향해 치달아왔던 오늘의 정치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 어떤 존재로 남아있게 되었는가를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청산과 개혁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돈지 1년여, 이젠 청산의 주체와 대상마저 혼동되어 누가 청산의 주체인지, 대상인지마저 혼란을 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 앞에 사죄하고 은둔생활을 자처했던 전임 대통령은 아직도 그 형형한 눈길로 『두 세명을 손봐야겠다』는 농담을 떠벌리는가 하면 구속되었던 어느 사람은 보석되는 길에 『용서가 최대의 복수임을 깨달았다』는 말을 했다.
누가 누구를 손보고,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인지 어안이 벙벙하다. 지금의 정치판을 얕보고, 국민을 업신여기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들이다.
청산의 대상으로 야당이 거론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는 자신의 진퇴와 관련 없는 전임대통령 증언문제를 사퇴조건으로 내걸기도 했었다. 정치는 국민과 동떨어진 채 끼리끼리의 의리나 흥정으로 되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성실한 반성으로 일관했어야 할 전임대통령이나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에서라도 청산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어야할 과거의 실세들은 행여 국민의 동정이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복귀의 가능성까지 기대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뿐인가. 「6공의 친·인척비리」라는 구설수에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는 또 다른 「실력자」는 「시기와 조건이 맞는다면 정치에 참여할 생각」임을 터놓고 천명하게 되었다. 나라에 봉사하는 길이 어찌 정치참여 뿐이겠는가.
지도력의 결핍과 정치력의 빈곤이 정국의 혼미와 집권당의 지리멸렬을 초래케 했다는 비난의 소리가 절정에 달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은 「밑에서 알아서 해보라」는 자세로 일관해 왔다.
어째서 집권당의 움직임이 구시대를 방불케 하는 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가. 이들을 견제하고 민주화의 새 물결을 창출하게끔 국민들이 밀어준 여소야대의 야당이 제 기능·제 역할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국민 앞에 자진해 약속했던 중간평가가 어느 날 느닷없는 유보·불 실시로 발표되자 야당은 뒤질세라 다투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입만 열면 중대한 결심을 하겠다, 정권의 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하면서 예산심의·법개정작업을 뒷전에 미루고 있다.
이들이 누구인가. 6월 항쟁을 거쳐 압제와 권위의 시대를 청산할 수 있었던 지난 대선을 눈앞에 두고 국민들이 열망해 마지않았던 야권통합·후보단일화의 여망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졌던 사람들이다. 5공 청산의 절대적 기회였던 대통령 선거전에서 실패하고는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그 정당들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계층간의 불화와 제몫 찾기의 욕구분출로 나라가 술렁이고 극렬 운동권의 무분별한 통일론과 과격 시위가 거리에 넘쳐나며 각목과 최루탄이 맞서 공장이 문닫은 채 노사분규의 험악한 갈등을 겪었던 지난 한해에 과연 어느 정당의 어느 정치인이 맑은 목소리를 드높여 무분별한 욕구의 자제와 폭력의 진정을 호소한 적이 있었던가. 재야 강경세력과 과격학생 집단의 눈치를 보면서 때로는 그들과 야합하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양다리 걸치기에 급급하지 않았던가.
시대정신의 흐름을 거역하고 민의의 소재와 민생의 향방을 외면한 채 오로지 개인의 대권 욕망을 앞세워 시류에 편승하고 인기에만 영합하려드는 오늘의 정치풍토, 오늘의 정치인들이기에 『오늘의 정치, 이대론 안된다』는 절박하고도 급박한 외침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 분노의 외침에 정치인들이 계속 귀기울이지 않고 환골탈태의 변신, 자정노력을 벌이지 않는 한 이 시대 정치인 모두가 청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파국의 국면을 면치 못 할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사의 조류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화의 물결을 사심과 야망의 차원을 뛰어넘어 온몸으로 수용하고 주도하는 그런 정치인을 국민 모두는 갈구하고 있음을 정치인들 스스로가 이젠 깨달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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