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경제개발' 회고록 개정판 낸 김정렴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82세의 김정렴씨는 1980년 8월 주일대사에서 물러날 때까지 36년간 공직에 있었다. 재무.상공장관을 비롯해 대부분 경제 분야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 경제 성장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특히 그는 9년3개월간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는 '박정희 경제사령관'의 총참모장이었다. 후임 정권 사람들이 박정희 시대를 폄하해도, '그때 그 사람들'같은 영화가 박정희를 조롱해도 그는 침묵했다. 반박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회고록만 썼다. 90년 '경제정책 30년사'를 시작으로 일어.중국어.영어로 된 경제성장사가 나왔다. 97년엔 정치회고록 '아, 박정희'도 나왔다. 그는 최근 경제회고록 증보개정판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를 펴냈다. 스스로 "생애 마지막 작업"이라고 말한다. 책 얘기를 듣기 위해 10일 그를 만났다. 그런데 그가 의외로 입을 열었다. 세태에 대해서 말이다. 26년 만이다.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부인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7년째 거동을 못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벽부터 몇 시간씩 원고를 쓰는 게 힘들었을 텐데 왜 어려운 작업을 했습니까.

김정렴씨는 이번 경제회고록 증보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에 대한 세계의 평가를 집중적으로 보충했다고 말했다. 김태성 기자

"세계는 10여 년 전부터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을 높이 평가했어요. 그런데 현 정권의 어떤 고위 간부가 평가를 하지 않는 말을 한 거예요. 그냥 지나치다가는 후세에 공부하는 사람들을 오도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회고록에 세계의 평가를 집중적으로 보충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김씨가 지적한 사람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다. 그는 지난 1월 세미나에서 "박정희는 밥을 많이 지어 놓은 모범적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후임 대통령들은 장작이 모자라 밥 짓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이 후손이 쓸 장작을 당겨다 써놓고 생색을 낸다는 뜻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백만 홍보수석은 "박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고교 교장이라면 노 대통령은 대학총장"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현 정권의 많은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업적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 좀 연구.공부가 모자라는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라고 하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았고 독재를 했으니 연구.검토할 필요가 없다'고 치부하는 거 같아요. 물론 자유민주주의에 있어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게 좋지는 않아요. 하지만 위로부터의 혁명, 즉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결과적으로 나라를 구해낸 혁명이 4개 있다는 게 후진국 정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정설이었습니다. 일본 메이지 유신, 터키의 케말 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장군이죠. 최근에는 박 대통령의 5.16도 포함해 5개 나라가 된 것이죠." -박 대통령 18년 동안 경제가 얼마나 달라졌나요. "61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89달러로 세계 125개국 중 101번째였어요. 파키스탄.토고.우간다.방글라데시.에티오피아 등과 더불어 최빈국 그룹이었죠. 북한은 320달러로 50번째였습니다. 멕시코.리비아와 포르투갈.브라질의 중간이었죠. 박 대통령의 18년 집권이 끝난 79년 한국은 1510달러로 49번째로 올랐고 북한은 120번째로 최빈국으로 전락했어요." -자주국방 개념하에 현 정권이 추진하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로 국론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 때도 자주국방 구호가 있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한국은 우선 경제 발전에 돈을 써야 하므로 돈이 많이 드는 것은 한.미방위조약에 의거해 미국에 의존하자고 했어요. 대신 재래식 무기는 우리 힘과 돈으로 해야 동맹국에도 체면이 선다는 철학이었죠. 최신예 공군.해군력은 미국에 의존하고 155m곡사포나 무반동 총 같은 건 우리가 하자는 거였지요. 그런 의미의 자주국방이었죠." -그땐 작전통제권 논란이 없었습니까. "자주국방이라 해서 자기 나라 혼자 국방을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어느 나라나 뜻이 맞고 이해가 맞고 역사적 관련이 있으면 동맹이나 연합을 만들어 함께 국방을 하는 거지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만 봐도 영국.프랑스 등이 강대국인데도 작통권을 나토 사령관에게 주잖아요. 한국의 경우 나토에 비춰봐도 하나도 주권이 (상하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한국 경제 성장 역사에서 미국, 특히 한.미안보동맹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경제적으로는 미국은 광대한 시장을 우리에게 열어 줬습니다. 아주 그냥 조건 없이…. 또 미국이 무상 경제 원조, 무상 공공차관을 줬어요. 한국이 굶주림과 질병의 한가운데서 독립한 후에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에도 미국이 한국에 민간차관을 많이 줬어요. 한국은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주한미군도 기여했나요. "그렇습니다. 미국이 안보 부분을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가 달러로 무기를 사야 했는데 그 달러를 안 쓰고 경제 개발했으니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이 도움을 받은 거지요." -북한의 참혹한 실상에도 불구하고 남한 내에는 남한의 현대사 인정에는 인색하고 북을 막연히 동경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우선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책 제목을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로 한 것은 그냥 말로만 그런 게 아니에요. 숫자를 검증해 보세요. 그러면 박 대통령과 남한이 잘했다는 걸 알 텐데 그걸 깨닫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대통령 비서실장 9년3개월 동안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기자 간담회나 외부 강연을 하나도 안 했지요. 반면 노 대통령의 비서실장들은 외부 노출에 적극적입니다. 최근에는 비서실장이 기자 간담회에서 여당 대표를 비판한 일도 있었지요. "저는 비서실장이나 비서실은 어디까지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를 안 내고 대통령을 잘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직원들에게도 늘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대외적 연설이나 간담회같은 건 공보수석비서관과 대변인이 하는 거지요. 자기 맡은 것만 열심히 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그리고 비서실은 소수 정예 엘리트로 써야 합니다. 사람이 많으면 쓸데없이 행정부에 간섭을 하지요. 지금 청와대와 총리실에는 위원회가 너무 많아요." -박정희 정권이 잘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과(過)가 있습니다. 70년대 안보 상황이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안보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유신하에서 여러 긴급조치를 취했지요. 그런데 이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구속이라든가 언론 제약이라든가 일부 인권 침해가 있었어요. 정부가 강압적으로 하니까 일부 공무원들도 덩달아 현장 설득보다는 안이하게 지시나 내리는 그런 과실 행정도 있었지요." 정리=신은진 기자<nadie@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 김정렴은… ▶1924년 서울 출생 ▶1941년 충남 강경상고 졸업 ▶1944년 일본 오이타 고등상업학교 졸업, 조선은행 입행 ▶1945년 조선은행에 복직 ▶1956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 ▶1959년 재무부 이재국장 ▶1966년 재무부 장관 ▶1967년 상공부 장관 ▶1969년 10월~1978년 12월 대통령 비서실장 ▶1979년 1월~1980년 8월 주일대사 ▶1990년 박정희 경제개발에 대한 회 고록 '경제정책 30년사'출간 ▶1997년 박정희 정치에 대한 회고록 '아,박정희' 출간 ▶2006년 경제회고록 증보개정판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출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