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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사 금지'가 이들을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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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강남 입시 논술시장의 양대 봉우리인 유레카와 초암을 비롯해 C, N, H 학원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학원들을 움직여 가는 주력이 바로 386 운동권이다. 강남의 논술 명문학원 중 비운동권 출신이 대표강사인 곳은 몇 안 된다.

사교육 시장이 번성한 가장 큰 배경은 널뛰기를 거듭한 정부의 교육정책이다.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을 학부모들이 사교육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권 386들은 대체 어떻게 강남의 논술 시장을 석권하게 됐을까. 혹시 그들이 과거의 운동권적 사고방식을 학생에게 주입하는 건 아닐까.

◆ 밥벌이 위해 시작했다=80년대가 운동권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운동권 좌절의 시대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해체, 소련의 몰락은 운동권에 커다란 좌절과 동요를 불러 왔다. 국내에선 군사정부가 물러나면서 운동권은 투쟁의 대상을 잃어버렸다.

80년대의 운동권이 90년대 중반 학원계에 투신한 것은 '밥벌이' 때문이었다. 초암아카데미 노원초암 함경목 원장은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선배의 제안을 받고 논술강사가 됐다. 그는 "학원강사는 이력서를 낼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한때 제적되거나 감방 경력이 있는 386 운동권은 90년대에 정상적으로 갈 곳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과거 경력을 캐묻지 않는 학원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학림논술연구소 대치본원 강상식 원장도 "(2001년) 9.11 사태가 터져 토론을 하다가 선배가 '너 지금 뭐 하냐'하며 논술 교재를 준 게 (내가 강사가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런 인연과 결속력으로 이들은 빠르게 논술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다 보니 특정 학원에 같은 계열의 운동권 선후배가 많다.

C학원의 경우 노동운동을 했던 민중민주(PD) 계열이 많다. A학원엔 박노해 시인 등이 관련됐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 관련자들이 있다. 대학과 노동운동 현장 혹은 감방 생활의 선후배 간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학원에 PD 출신이 많고, 어느 학원에 민족해방(NL) 계열이 많다는 건 이들 사이에선 다 알려진 비밀이다.

하지만 학원 측은 학원강사들의 과거가 외부에 알려지는 게 내키지 않는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 정부 정책 덕분에 컸다= 94년 주요대학에서 사실상의 본고사가 부활됐다. 그 무렵엔 논술시험인 국어와 영어.수학 시험을 봤다. 그런 분위기에서 초암(94년), 유레카(96년)가 생겼다. 조모 강사는 "수요가 늘게 되면서 논술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97년 이후엔 논술고사만 남았다. 학교 교육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본고사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99년부터는 논술고사가 주요대의 입시를 좌우하게 됐다. 당시 초암과 유레카는 서울대 등 주요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이 두 학원은 급속히 성장했다.

초암아카데미의 이모 대표는 "당시 17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세 명은 경희대 한의대, 연세대 의대, 이대로 갔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대에 진학했다"며 "다음해 목동에 분원을 냈는데 240명 정원에 1200명이 몰려왔다"고 말했다.

2008학년도 서울대가 논술을 통합교과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하면서 사교육 시장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초암아카데미 성민기 원장은 "시장은 냉정하다"며 "가치가 있으면 투자가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 운동권이어서 성공했다=80년대 운동권에선 PD와 NL 계열 사이에서 치열한 사상 투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시로 팸플릿이 회람됐고, 수없는 세미나와 토론, 대자보 작성이 이뤄졌다. 대중 설득도 중요한 실력이었다. 386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상대방의 허점을 공격하는 기술을 익혀 나갔다는 것.

조모 강사는 "운동을 하면서 10여 년간 학습을 했다. 운동권 아니면 체계적인 학습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상식 원장은 "우리는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대안, 헌신성이 있었고 자기계발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운동권이었기에 논술시장에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강사는 "비운동권 출신들은 거대 담론을 접할 기회가 적었고, 한 분야에서만 강해 논술 강의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초암아카데미 함경목 원장은 "90년대 이후는 운동권이 취약해 논술 시장에서 크지 못했다"고 했다.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비판에 대해 이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조모 강사는 "누구도 밥벌이를 나쁘다고 할 순 없다"며 "우리의 공통 가치는 '우리는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학림논술연구소 대치본원 강상식 원장은 "공교육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대해 원죄 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고정애 기자, 강승우.김윤미 인턴기자

<ockham@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 바로잡습니다
8월 11일자 6면 '강남 논술시장 절대 강자 386 운동권' 제목의 기사와 함께 서울 대치동 논술학원 수업 장면 사진이 나갔습니다. 이에 대해 사진 속의 학원강사는 "사진 촬영에 동의했지만 나는 386 운동권이 아니다"며 이를 분명히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해당 강사에게 사과드립니다.

*** 바로잡습니다

8월 11일자 6면 '강남 논술시장 절대강자 386 운동권' 제목의 기사에 실린 사진 속 학원강사는 기사와 무관한 것으로 밝혀져 이를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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